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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냐? 화해냐?
마태 14장 1-12절
저는 요즈음 정의의 문제와 화해의 문제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정의도 실현하고 화해도 이룰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면 종종 화해와 충돌합니다. 그러면 아주 고민스럽습니다. 요즈음 이런 고민에서 정답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 한국과 북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일각에서는 북한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하고 질문합니다. 보수적인 목사님조차도 북한이 워낙 호전적이므로 잘못하면 전쟁 날지도 모르는데 이쯤에서 화해하는 것이 좋지 않나하고 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말에 저는 “안 됩니다. 적어도 1년은 이대로 가야 합니다.”하고 버티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북한이 사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북한이 사과할리는 절대 없습니다. 북한은 과거 KAL기 폭파사건도 사과하지 않고 계속 한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현희라는 꼼짝없는 증거가 있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니 북한의 사과를 기대하지 않고 지금의 대결구도를 그냥 밀고가야 합니다. 그래서 북한이 뼈아프게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1년 후 쯤에 화해의 과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지금 우리가 북한과 화해한다면 북한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한국은 역시 맞아야 정신차리는 구나. 北이 협박을 해야 겁먹고 후퇴하는 구나. 그러니 앞으로도 남한이 까불면 다시 한방 때리자”라고 할까요? 아니면 “천안함이 피격됬는데도 북한을 돕고 화해를 청하는 것을 보니 너무 감동적이다. 앞으로는 한국을 잘 대해주자”라고 할까요? 後者라면 너무 좋겠지만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는 이 답변은 유감스럽게도 前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화해한다는 것은 화해가 아니고 굴종이고 항복입니다. 교회는 전쟁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그리고 북한에 대한 굴종을 화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하면 안 됩니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진정한 화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른 말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른 말 한다고 칭찬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세례요한은 바른 말을 한 대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취했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누구의 눈에도 이것은 명명백백한 잘못입니다. 이 명백한 잘못을 세례요한이 지적했을 뿐인데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을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극찬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하고 화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아도 예수님은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두려워 말아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두려워해라”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단호한 말씀입니까? 죽을 각오로 진리를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성경말씀에서도 바른 말은 항상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평화를 반대하십니다. 북한 땅에는 분쟁과 갈등이 없습니다. 외견상으로는 평화만 있습니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김정일의 말에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이 평화는 거짓평화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기독교는 이 거짓평화를 깨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을 질타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요즈음 한상렬목사가 북한에 불법입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가서 천안함 사건의 원흉은 이명박이라는 망발을 했습니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장로회는 한상렬목사를 옹호했습니다. 기장교단이 한상렬목사를 옹호한 것은 더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감히 한상렬 목사를 비난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비난하는 사람은 꼴통보수라는 지탄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른 말 하는 사람은 출세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원만해야 출세합니다. 아무리 이명박정부라 하더라도 꼴통보수로 찍힌 사람은 출세시키지 않습니다.
또 바른 말 하는 사람은 의리도 저버려야 합니다. 과거에 제가 경실련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포항제철이 경실련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 포항제철이 선거법을 위반했습니다. 제가 공선협 사무처장이었기 때문에 포항제철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도운 기업을 거꾸로 고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포철에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목사님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그때 너무 머리가 아파서 한주일간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정의의 반대는 의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의리를 저버릴 용기가 없으면 정의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른 말을 하면 한편으로 치우친 사람, 인간적으로 못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민운동이 자꾸 좌편향으로 갈 때 참다못해 시민운동을 비판했습니다. 그랬더니 후배들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시민운동을 비판하지 말고 제발 가만히 있어주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우리가 목사님을 시민운동의 큰 어른으로 계속 모시고 받들겠습니다.” 나는 답변했습니다. “미안하다. 나는 그렇게는 살지 못한다. 할 말 하면서 살지 못하면 속이 터져 죽는다” 그리고 결국 저는 후배들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좌파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최근 들어보니 3-40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서경석 목사는 기피인물이랍니다. 그 말을 듣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할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할 말을 하는 것을 여전히 나의 십자가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옳은 말이 꼭 옳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옥중성도들이 해방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바깥에 있는 기독교인에게 우상숭배한 것을 회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라고 하면 하나요 안 하지요. 결국 총회가 갈라져서 고신교단이 생겼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옥중성도가 바깥의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용서하고 넘어갔어야 했었습니다. 바깥에서 양떼를 돌보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소 하고 그냥 넘어갔더라면 총회는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옥중성도들은 한국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이 옳은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1987년 민주화가 된 후 기독교 민주세력은 독재 편에 섰던 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회개를 거부했지요. 그때도 그냥 용서하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용서하지 않는 바람에 교회가 하나될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도 그때 회개하라고 소리 지른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한참 후에야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때가 늦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용서할 때 상대방이 잘못을 회개해야 용서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짧은 생각입니다. 회개하지 않아도 용서해야 합니다. 1988년 말에 저는 한 후배에게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니 우리 스웨덴과 같은 나라를 만들어도 좋지 않니”하고 귓속말을 했다가 “서경석 선배가 개량주의자라는 증거가 잡혔다”며 후배들이 저를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직에서 내쫓는 운동을 했습니다. 기독교기관에서 생각이 온건하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되었으니 이것처럼 원통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후배 놈들도 천하의 나쁜 놈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는 NCC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쫓겨난 후 기독교를 떠나 일반 시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실련이라는 시민단체입니다. 그런데 저는 나를 쫓아낸 후배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놈들이 내게 찾아와서 용서를 구한 놈이 한 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참 후에, 아마 십년은 족히 지난 후에야 제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 나의 일생의 최대의 실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곧바로 그들을 용서하고 이념의 덧에 걸려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음을 잘 이해했더라면 나는 그들과 화해하고 그들과의 선후배 관계를 계속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보수 진보로 나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하는 데에도 내가 기여할 몫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끝내 그 모든 후배들과 등졌고 그 원한과 반목관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서경석입니다. 당시 저는 매를 때린 사람이 화해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매맞은 사람이 화해하는 법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정의와 화해의 문제는 매우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회개하지 않아도 용서해야 하는 때는 상대방은 강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약하고 나는 약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강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북한 김정일의 경우는 어떠해야 하나? 한상렬목사와 같은 친북좌파세력에 대해서는 어떠해야 하나? 이 경우에는 우리는 단호하게 “노”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에게 세례요한이 단호하고 “노”라고 말한 것처럼 어떤 대가도 감수할 각오로 김정일과 그 추종세력을 향해 단호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나라가 바른 길로 갈 것입니다. 약한 자는 보듬어 안아야 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맞서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친북좌파 세력이 약하고 나라가 안정되어 있으면 한상렬 목사를 구태여 사법처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정신나간 사람으로 간주해서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나라가 얼마든지 흔들릴 상황입니다. 꼴통보수로 찍히는 것을 개의치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 결연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서울조선족교회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처럼 바른 말 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58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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