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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원고> 따르미의 다짐
서경석 목사
오늘 <나눔과 기쁨>은 처음 “따르미 수련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따르미 수련회”는 여러분도 생전 처음일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제가 이 수련회를 주도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앞장서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나누미수련회를 통해 예수님처럼 살자고 다짐했는데 말만 해놓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짐을 했으면 구체적인 서약도 하고 실천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따르미수련회”에 役事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따르미가 된다면 구체적으로 “따르미의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짐도 한 번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꾸 보완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군가가 초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초안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다음 여덟 가지를 우리의 다짐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따르미는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자”는 말은 따르미를 한마디로 설명한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 향기가 풍겨야 하고 도덕성과 인격을 연마하고 매일의 기도 속에서 피나는 자기 수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과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이 분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따르미들은 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서는 절대로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힘을 합해서 공동으로 노력하면 상당 부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이를 구체적으로 서약해야 합니다. 저 역시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수없이 했지만 구체적으로 서약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따르미 서약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나눔과 기쁨>덕에 이런 서약을 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분투하는 일도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따르미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따르미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 따르미 사이트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공동체적 수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따르미 서약은 공개적으로 말할 사안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들끼리의 비밀서약입니다. 이점을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순간 우리는 금식과 십일조를 자랑한 바리새인처럼 되고 맙니다. 이 각오를 가지고 예수님처럼 살기위해 분투하십시다.
둘째로 따르미는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따르미는 도움을 호소하는 어떤 손길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한 사랑실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동안 “도움을 호소하는 어떤 손길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좌우명은 지난 20년 동안 경실련 시민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저의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의 좌우명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든 저를 찾아와서 저를 만날 수 있도록 일요일 오후1시부터 5시까지는 꼭 서울조선족교회의 내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구든 방문을 열고 들어와 저를 만날 수 있기 위함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그런대로 간신히 좌우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게 이메일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까지도 도우려고 안간 힘을 썼습니다. 저는 서울조선족교회 담임목사를 하면서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제일 어려운 경우가 암환자가 찾아오는 경우입니다. 암센터에 입원시켜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병원에 가서 모든 비용을 우리 교회가 책임지겠다고 서약합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가서 뱃장을 부립니다. 이 방법 밖에는 사람을 살릴 길이 없습니다. 병원측이 돈을 내지 않으면 길거리로 내쫓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 환자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워가겠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배째라입니다. 대부분의 병원은 그 정도에서 봐주는데 어떤 병원은 악착같이 우리를 상대로 재판을 걸지요. 그러면 결국은 목사가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돈을 다 그 병원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또 한 번은 조선족 깡패가 괴사병에 걸려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이 깡패가 자기를 차별한다고 교인들에게 칼까지 휘둘렀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우리는 끝내 그 깡패를 내보내지 못하고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그래도 서울조선족교회에서는 부목사님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악착같이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나눔과 기쁨 따르미들이 각오를 하고 악착같이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하지만 같이 하면 가능합니다. 사랑밭이라는 단체를 만든 권태열목사님은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길거리에서 만난 행려병자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행려병자를 만날 때마다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집에 행려병자가 넘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돕기 시작하면서 사랑밭이라는 복지단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아마 가톨릭교회의 꽃동네도 모르기는 몰라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따르미들도 길거리에 행려병자가 있으면 그냥 들쳐 업고 집으로 데려가자는 것입니다. 혼자 그렇게 하려면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따르미가 행려병자를 열명데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열명의 따르미가 한명씩의 행려병자를 데리고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洞이든 구청이든 경찰서든 대책을 강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저질러야 합니다. 저질러 놓고 보아야 합니다. 한번은 저희 교회에서 조선족동포들이 이제 곧 불법체류자가 되는데 자기들은 절대로 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2천4백명의 동포들이 여의도 고수부지에 모여 눈물의 결단예배를 보고 50여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무턱대고 큰 교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에서 농성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몇 개 교회는 그래도 우리를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우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단식 18일째 되던 날 우리는 다시 승리하여 한국에 있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그 농성과정을 끝내면서 7백명의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그분들에게 전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자꾸 불가능하다고만 하지 말고 저질러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셋째로 따르미는 공동체적 영성훈련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목사님들께서 개인적인 기도생활이나 교회에서의 영성훈련은 너무도 잘하시겠지요. 그런데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나눔과 기쁨>차원에서의 공동체적 영성훈련입니다. 그동안 각 연합회 활동을 보면 활동이 잘 진행되다가 무너지는 경우를 봅니다. 반찬나눔이 잘 진행되다가 중간에 중단이 됩니다. 그리고 나누미 공동체도 무너져 버립니다. 왜 그렇게 되나? 목사님들이 반찬도시락을 타가려는 생각만 하지, 이 운동의 중요성을 잘 새기지 못하고 공동체적 영성훈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빼먹기도 하고 게을러 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반찬나눔 사역이 중단됩니다. 만일 나누미들이 모일 때마다 열심히 기도회를 하면서 공동적인 영성훈련을 계속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활발하게 이 일을 하는 연합회는 항상 기도회를 하며 영성훈련에 힘쓴 연합회입니다. 공동체적 영성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눔과 기쁨>공동체는 유지되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지 못하고 갈등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지쳐버립니다. 반찬나눔운동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나눔과 기쁨>프로그램 중에 가장 알맹이와 같은 프로그램은 바로 영성훈련입니다. 아무리 “성령충만한” 목사님들의 모임이라 하더라도 이점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점을 명심하면서 지부는 지부대로 매주 한번씩, 연합회는 연합회대로 매월 한번씩, 전체는 1년에 한번씩 공동 영성훈련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영성훈련은 꼭 기도회만이 아닙니다. 어려운 이웃에 대한 봉사활동도 영성훈련입니다. <나눔과 기쁨>은 성탄절 며칠 전에 모든 나누미들이 일제히 지체장애자수용소나 노인그룹홈 같은 곳에 가서 자원봉사활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빨래도 하고 목욕도 시키고, 환자에게 밥도 떠넣어 주는 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같은 목사들은 종종 입으로만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몸으로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따르미는 <나눔과 기쁨>에 주신 주님의 특별한 사명을 자각하고 <나눔과 기쁨>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따르미는 <나눔과 기쁨>의 주인입니다. 주인은 내색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손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이제부터 따르미는 <나눔과 기쁨>을 위해 조용히, 그리고 가장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따르미는 <나눔과 기쁨>을 사랑과 보살핌이 넘치는 단체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누미들은 서로 형제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동안 연합회나 지부내부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작년에는 나눔과 기쁨 본부에서 조차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일부 나누미들이 떨어져나갔습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다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수습하느냐입니다. 내가 자존심과 욕심과 미움을 가지고 대처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끝까지 사랑의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했습니다. 끝내 갈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제가 그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요즈음도 지역 연합회에서, 그리고 연합회와 중앙본부 사이에서 갈등과 미움이 해소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향기를 발산시키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러한 갈등과 미움을 사랑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다섯째로 따르미는 한국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위해 부름받았음을 자각하고 교회갱신의 主役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갱신되고 새로워진 모습을 국민 앞에 보여야 합니다. 이점에서 교회갱신은 복음전도이상으로 중요합니다. 갱신되지 않으면 복음전파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제일주의의 병폐들을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바꾸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랑과 정의의 化身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의 한기총을 보아도 참으로 절망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이 한기총의 개혁인데 이광선 대표회장님이 그렇게 고생하며 노력해도 개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눔과 기쁨>의 목사님과 같은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갱신세력으로 나서야 합니다. 교회의 병폐와 교회의 정체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바로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기 때문에 이분들이 나서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해서 작은 교회가 스스로를 미화하거나 도덕적인체 하면 안 됩니다. 지난 날 민중신학이나 민중교회의 가장 큰 잘못이 바로 자기들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 태도였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복음주의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독선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선이라는 죄는 복음주의든 진보적 교회든 가리지 않고 우리를 파고 듭니다. 사실은 저도 젊은 시절에 이런 독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 특별히 제가 다니는 새문안교회가 위선, 사회적 무관심, 교권주의, 바리새주의, 분렬, 비민주, 물질주의, 개교회주의 등의 온갖 중병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갱신되려면 의식이 있는 장로들이 피택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회와 청년회를 조직하고 고등부교사와 고등학생까지 조직을 해서 제가 약 150표의 세례교인 표를 확보했습니다. 제가 누구를 찍으라고 지령을 내리면 150표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이 표는 당시 누구를 당선시키지는 못해도 누구를 낙선시키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막강한 힘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서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아서 돌아와 보니 대학생회가 폐쇄되고 교회 안의 진보적인 세력은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표를 동원해서 자의적으로 장로를 선출하겠다는 생각자체가 아주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교회갱신의 役事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 행동은 교회를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왜곡과 파행으로 끌고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제가 믿음이 깊지 않아 그점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갱신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손톱만큼도 우리가 독선으로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갱신을 부르짖는 이유는 우리자신이 죄가 너무 크고 죄의 고통을 너무 겪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갱신의 길로 나서야 합니다. 여섯째로 따르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순수하게 복음만 전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목사님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복음이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 지난 130년의 한국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복음이 가장 잘 전파되었던 때는 삼일운동 당시와 70년대에 한국교회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때였습니다. 교회가 우리민족의 희망으로 비쳐져야 복음이 잘 전파됩니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도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살고자 한다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도 목숨 걸고 해야 합니다. 지나간 70년대에 수백, 수천의 기독교 젊은이들이 감옥을 갔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을 갔는가? 그 이유는 당시 이 운동을 주도한 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기독교인보다 더 열심히 악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청년,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민주투쟁을 했기 때문에 기독교 인구가 20%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학생운동, 기독청년운동은 일반 학생운동, 일반청년운동과 거의 대등하게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하려면 기독교사회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한 선포만으로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예배공동체이지, 사회운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큰 교회는 교회 안에 보수, 진보가 있고 여야가 있어서 사회문제를 놓고 바른 말을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회문제에 대해 바른 말을 하는 일도 작은 교회가 감당해야 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사회운동은 더욱 그러합니다. 지나간 70년 대에도 기독교사회운동에 앞장선 교회들은 다 작은 교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지나간 70년대에는 한국교회의 역사가 백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이 감옥을 가며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계교회가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한국을 찾아와서 그 이유를 조사한 후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교회 내에는 한편에 교회, 노회, 교단총회, NCC 등 제도교회 기구가 있고 다른 한편에 기독학생운동, 기독청년운동, 산업선교, 인권목회자운동, 기독자교수운동 등 기독교사회운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흐름이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인권운동을 맹렬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사회운동이 독재와 싸우다 감옥을 가면 교회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영치금을 넣어 주고, 석방 후에도 직장을 갖도록 돕고, 이들의 고난이 신앙적인 결단에서 비롯된 것임을 교인들에게 알리면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기독교사회운동을 뒷받침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기독교인권운동이 교회로 하여금 우리민족의 희망이 되도록 만들고 교회의 자긍심을 높이어서 그 결과로 교회도 크게 부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지금은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않는가? 교회가 큰 잘못을 해서가 아닙니다. 나라가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기독교사회운동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성교회만의 노력으로는 기독교를 우리민족의 희망으로 만들 수 없는 법입니다. 물론 70년대의 기독교사회운동과 지금의 운동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 민중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북한인권운동, 친북좌파반대운동, 선진화운동, 재개발정책 변경운동, 지방분권운동과 같은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따르미들은 우리나라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만 보고 설교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책임이 다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따르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심경으로 이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일곱째로 따르미는 자기발전을 위해 매일 精進하면서 새 꿈을 꾸고 새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만큼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역량은 매우 크지만 우리는 그 역량의 극히 일부 밖에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1달란트를 받아서 땅에 묻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시 내어놓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뿐입니다. 우리들 따르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남김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 일을 시작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민족과 이 세계를 복음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밖에 살지 않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성직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바쳐 헌신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은퇴가 없어야 합니다. 이제는 평균수명이 90세가 아니라 백세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95세까지는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은퇴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병이 들어도 침대에 눕지 않으려고 합니다. 길에서 걸어가다 죽을 생각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생명을 불태우고 싶습니다. 따르미 목사님들이 이런 각오로 큰 일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덟째로 따르미는 항상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이 고백만이 우리를 겸손함으로 이끌고 우리를 끊임없이 분투하며 살도록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이 고백이 괜한 말이 아닙니다. 저는 진짜로 너무 부끄러운 죄인이고 위선자입니다. 내 죄가 너무 많고 커서 공개하지도 못합니다. 사실 우리 목회자들은 항상 경건한 척 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위선자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더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따르미가 되려고 분투하게 된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절절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따르미의 서약을 하는 것도 결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이 서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의 비밀약속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분투하는 삶이 언제까지 갈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지쳐 나가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래도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저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천상의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죄인됨의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이 길을 달려가도록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58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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