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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GO, 어디에 서 있는가? - 한국시민운동의 전개과정과 향후방향 - 서경석목사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
1. 글머리에
오늘의 시민운동을 평가하려면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밟아왔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효시는 경실련의 출범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실련 출범의 의의를 설명하려면 재야운동의 성격부터 말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재야운동의 시대는 어떠했는가에서부터 시작해서 경실련 출범의 의의를 말하고 이러한 초기 시민운동의 성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변질의 과정을 밟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재야운동의 시대
지나간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한국의 주류 시민사회운동은 반체제적 재야운동이었다. 권위주의 체제가 사회 각 분야를 포섭하고 포섭당하기를 거부하는 세력을 탄압했기 때문에 당시의 시민사회운동은 반체제적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암울한 시대에 萬難을 이겨내며 독재와 싸우기 위해서는 흑백논리적 이념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혁명사상까지도 스스럼없이 수용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재야운동의 중심세력은 김일성주체사상(NL), 맑스레닌주의(PD), 모택동주의 등으로 무장했고 이에 따라 내부의 이념투쟁도 심각하였다. 반면에 기독교운동은 민중신학론, 해방신학론 등의 또 다른 흑백이념으로 무장하였다. 이러한 흑백논리는 엄혹한 상황에서 敵의 정체를 명확히 하고 我軍을 단결시키는 데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흑백논리는 자기반성적 성찰 능력을 키워주지 않아 87년 민주화 대항쟁을 거쳐 민주화과정에 진입한 후에는 사회운동이 변화된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세상이 변하여 일반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도 정치적 억압을 느끼지 못하고, 합법적으로 자기의 의사를 표출시키는 기회를 만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야운동이 이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비합법 운동을 계속하며 모든 잘못을 미국과 노태우정권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주의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일반국민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재야운동은 점차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고 87년 6월 민주화대항쟁 당시 재야운동을 지지했던 도시의 중간층은 이러한 지지를 철회하고 다시금 보수화의 길을 가게 되었다.
3. 시민운동의 시대
3-1 경실련의 출범
1989년 7월 경실련의 출범은 시민사회운동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대사건이다. 경실련 창립자들은 우리 사회가 보수화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걱정하였다. 방금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사회로 전환을 시작하면서 산적한 개혁과제를 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가 다시 보수로 회귀하는 것은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실련 창립자들은 보수화를 막는 방법이 재야세력의 강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야세력이 커질수록 우리사회는 그 반동으로 더욱 보수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른 해답은 보통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시민운동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보통 시민층은 과거에는 재야운동에 의해 길거리에서 구경만하는 기회주의자로 비난 받았지만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지 않고 투표로 정권이 바뀌는 세상이 되면 오히려 정권의 향배를 결정하는 세력이 된다. 이들은 안정 속의 개혁을 원하는 세력인데 안정보다 개혁을 원하면 야당을 찍고 개혁보다 안정을 원하면 여당을 찍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시민들(중간층)의 의사에 따라 정권의 향배가 결정되기 때문에 이들이 신뢰하는 사회운동이 가장 큰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경실련은 출범하면서 자신을 시민운동으로 명명하고 보통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경실련은 운동방법론에서도 재야운동과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첫째로 이제는 더 이상 비합법운동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정부가 합법적인 공간을 허용한 이상 합법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해야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계급적 입장을 포기하고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처럼 정치권력이 기득권과 결탁하여 기층운동을 억압할 때에는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지만 누구든 합법적으로 집회 및 시위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뿐 아니라 약사, 의사, 한의사, 교사가 다 자신의 의사를 마음껏 분출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는 시시비비를 가려서 누구의 입장이 사회적 공공선에 부합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노동자가 탄압을 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집단이기주의를 표출시키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가 탄압당할 때는 그들의 편에 서지만 집단이기주의를 표출시킬 때에는 기업주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경실련의 생각이었다. 셋째로는 이제 더 이상 변혁론으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고 합리적 대안모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길거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데모하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도덕성을 견지하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적 역량을 가진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넷째로 경실련은 우리사회의 발전이 시장경제의 역동성에 기초하되 다만 시장이 가져다주는 빈부의 양극화현상을 정부가 개입하여 시정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기업을 적대시하면 안 되고 기업인까지도 시민운동에 동참시키고 기업인과 노동자를 생산자계층이라고 한다면 생산자 계층의 편에 서서 불로소득 계층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실련은 재야운동으로부터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기득권층으로부터는 얼굴을 바꾸어 나타난 또 하나의 재야운동으로 간주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실련은 우리사회의 주류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5년 후에는 시민운동이 완전히 재야운동을 대체하게 되었다.
3-2. 참여연대의 출범
1994년 참여연대의 출범 역시 시민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여연대의 출범은 마지막까지 재야운동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시민운동으로 전향함으로써 재야운동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재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진보적인 시민운동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경실련이 과거의 재야운동과 선을 긋고 재야운동과는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지고 출범한 단체였다면 참여연대는 재야세력이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포기하고 시민운동에 합류하기는 하였지만 계급주의 노선의 유지와 북한에 대한 무비판, 그리고 비합법 운동론의 유지라는 점에서 지난날의 재야운동을 계승한 단체였다는 차이를 갖는다. 그리고 진보적 시민단체의 출범에 이어 좌파 이념으로 무장한 386세대가 시민운동의 실무자로 들어오면서 시민단체들은 점점 더 좌편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94년에서 2천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의 시민사회는 경실련식의 온건시민운동과 참여연대식의 진보시민운동의 각축시대를 맞게 되었다. 두 단체는 부정부패, 경제정의, 시민참여 문제 등에 있어서는 노선차이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노사문제, 남북관계에서는 선명한 차이를 드러내었다. 경실련이 노사문제에서 시시비비의 입장이었다면 참여연대는 親노동자의 입장을 분명히 견지했고, 북한문제에 있어서도 경실련이 북에 대해 종종 비판적이었다면 참여연대는 반미친북의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은 이러한 노선차이를 감지하지 못했다. 단지 과거에는 온건했던 시민운동이 강성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졌을 뿐이었다.
3-3. 2천년 낙선낙천운동의 의미
2천년 낙선낙천운동은 시민운동 성격의 변화를 가져다 준 대사건이었다. 낙선낙천 운동은초기의 시민운동이 견지한 기본성격을 전면적으로 뒤집었다. 낙선낙천운동은 선거법은 악법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낙선낙천운동이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낙선낙천운동이 정한 낙선자 리스트는 無誤한 것이라 하여 일체의 변경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낙선낙천운동은 초기 시민운동의 합법노선을 거부하고 법위에 군림하면서 스스로 판관이 되어 정의의 잣대를 독점하는 운동으로 국민 앞에 보인 셈이고 결과적으로는 시민운동의 묘혈을 판 운동이 되었다. 낙선낙천운동은 당시에는 한 달 내내 일면 톱기사였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시민운동은 더 이상 공정성을 추구하는 운동이 되지 못하고 국민에게 편향적인 시민운동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그 결과 낙선낙천운동은 특정정당을 지지하는 운동으로 간주되었고 영남지역에서는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켜 야당세력의 확대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낙선낙천운동은 비합법운동 노선으로 인해 국민 앞에 법과 질서를 호소할 수 있는 도덕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사회에서 포퓰리즘이란 용어가 유행하게 된 것도 낙선낙천운동 때문이었다. 원래 시민운동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다중의 여론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운동가 개인의 양심적 판단에 의존했었다. 이러한 시민운동이 낙선낙천운동을 겪으면서 포퓰리즘 운동으로 전락한 셈이다. 그런데 낙선낙천운동의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제까지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시민운동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했으며 시민운동의 권력화 현상이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 내부의 동맥경화 현상으로 言路가 막히고 낙선낙천운동을 비판한 사람들은 거꾸로 시민운동에서 추방당했다. 낙선낙천운동을 계기로 진보적 시민운동과 온건 시민운동과의 각축은 진보적 시민운동의 승리로 결판이 났지만 이로 인해 그 후의 시민운동은 홍위병적, 좌편향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켜 가게 되었다.
3-4. 미선이효순이 촛불시위
2002년 말의 미선이효순이 촛불시위 역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이 시위의 가장 큰 의미는 노무현 정권의 등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이 사건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한국의 진보적 시민운동과 친북좌파세력이 결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박원순, 최열과 같은 시민운동 지도자들은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평등한 한미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서서 반미운동으로 비화하는 사태에 동조했다. 이로 인해 우리국민은 진보적 시민운동과 친북좌파운동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미친북세력에 대한 규탄이 커질 때 진보적인 시민운동도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 와서는 이 둘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둘째는 미선이효순이 촛불시위가 반미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우리사회의 우파세력이 위기의식을 심각하게 느끼고 결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조용히 지내오던 우파들이 궐기의 명분을 갖고 행동하는 사회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사회운동은 종래의 진보 내지 중도 중심의 운동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로 전환되었고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등 우파시민운동이 등장하고 나아가 국민행동본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 극우세력의 결속도 강화되었다.
4. 애국운동의 시대
4-1. 뉴라이트 운동의 등장
2004년 가을 뉴라이트 운동의 등장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운동사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대사건이다. 노무현정부가 국가보안법, 과거사법, 언론법, 사학법의 개폐를 밀어붙이고 편가르기를 하면서 우리사회는 또 다시 심각한 좌우 대결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노정권에 대한 심각한 민심이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뉴라이트 운동, 선진화운동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선진화국민회의나 기독교사회책임은 스스로를 우파운동이라고 칭하지 않았지만 언론은 선진화운동을 뉴라이트 운동의 한 갈래로 취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뉴라이트의 등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나라가 과거 권위주의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전환하면서 종래의 재야운동이 민주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시민운동이 재야운동을 대체하게 되었다면 이번에는 시민운동이 좌편향으로 흐르면서 한국사회의 위기국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뉴라이트 운동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사회에서 민주화사회로 전환과정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 과정은 순탄하지 못하다. 성숙되고 良識있고 절제된 민주주의로 가기 보다는 민주주의의 과잉현상으로 치닫는다. 한국의 경우에도 민주화과정은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좌편향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과거 민주화운동 시기에 김일성주체사상으로 무장했던 학생세력들이 정치권, 시민운동, 언론계, 노동계 등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여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그 결과 집단이기주의와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사상의 자유를 과도하게 주장하고 과도한 경제민주주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 과잉현상은 심각한 사회위기로 이어졌다. 우리나라가 꼭 이러한 위기를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민주화과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원치 않는 결과를 만난 것이다. 특별히 노무현 정부는 이점에서 책임이 컸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부는 어느 한편에 크게 치우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시민운동은 특정정당을 지지하지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중립을 표방할 수 있었고 정책에 대한 시시비비만 가릴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는 좌편향과 편가르기가 심해지면서 더 이상 중립적인 시민운동이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민운동은 親정부와 反정부,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특별히 우리사회가 좌편향 및 민주주의 과잉으로 치달으면서 우리국민은 나라를 좌파세력으로부터 지키고 나라를 선진화하기 위한 애국운동을 절실하게 요청하게 되었다. 뉴라이트 운동, 선진화 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들은 당시 한국의 상황을 위기상황으로 진단했다. 이 상태로 가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어렵게 된다. 우리나라가 급속도로 고령사회로 가고 있어서 향후 15년 내로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년 4%의 경제성장으로는 국민소득 3만 불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사회분위기를 혁신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체코처럼 선진국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주저앉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선진화세력을 구축하여 선진화를 저해하는 세력을 강력하게 제압해야 한다. 이러한 뉴라이트 운동은 과거에 군사독재체제에 협력한 전력이 있는 올드 라이트가 아닌 민주화 운동 출신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좌파와의 대결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4-2. 맥아더동상 철거사건
2005년 9월에 있은 맥아더동상 철거시도 사건은 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사회에 친북좌파 세력이 강력하게 포진되어 있음을 국민에게 눈으로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맥아더 동상 철거사건 이전에는 대부분의 국민이 우리나라에 친북좌파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을 믿지 않았다. 공산권이 망하고 북한도 비참한 상황 속에 있는데 한국에 어떻게 친북좌파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북좌파란 말은 극우세력이 진보세력을 메카시즘적으로 공격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맥아더동상을 철거하려 한 세력은 친북좌파라는 말 이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세력이었다. 6.25때 김일성에 의해 통일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민노총, 민노당, 전교조, 한총련, 전농, 범민련, 진보연대 등 3-40만명의 우리나라 최대의 세력이었다. 이들은 구(舊)좌파처럼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계급주의적,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세계화를 반대하고 평등주의에 집착하였고 반미친북의 입장에 서서 북한인권 문제 제기를 반대하고 국가보안법의 즉각 폐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후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시위를 주도하고 비무장한 군인들을 공격하여 수십명을 부상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국민으로 하여금 친북좌파 척결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임을 깨닫게 만들었고 친북좌파세력이 활개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조건 한나라당으로 정권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모든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였고 대선에서도 이명박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이명박 후보 승리의 결정적인 원인은 한마디로 맥아더동상 철거사건과 평택 미군철수시위 사건의 반사이익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3. 이명박 후보의 대선승리
2007년 12월 이명박 후보의 대선승리는 또 하나의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대선결과로 진보진영은 정신적 恐慌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커다란 상황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민주당에서는 우파성향의 손학규씨가 당대표가 되었다. 손학규 대표가 민주당을 온건한 방향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민노당에서 일어났다. 노회찬, 심상정씨가 민노당을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새로 출범시켰다. 이들은 더 이상 친북좌파세력은 안 된다고 판단하고 從北주의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진보세력 내부에서 친북좌파와 단절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만일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면 우리사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을 것이다. 진보적인 시민운동 내부에서 미선이효순이 사건 이래로 친북좌파와 결합해 온 것을 반성하고 친북좌파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이명박 정부의 잘못은 이러한 진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명박 정부의 최대의 실수는 이명박 선거켐프가 잘해서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명박정부는 겸손한 자세로 광범위하게 인재를 구하지 않고 자기들 켐프 내부에서만 사람들을 발탁했고, 박근혜, 이회창씨 등과 함께 범보수 연합을 구축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고소영, 강부자로 상징되는 人事실패를 초래하였고 총선에서 기대만큼의 성공도 이루지 못하였다.
4-4. 광우병 촛불시위 사건
광우병 촛불시위는 친북좌파세력이 얼마나 순발력과 신축성을 가지고 운동을 전개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시위사건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친북좌파들에 의해 계획된 사건이었다. 이점은 처음 촛불시위를 시작한 주관단체의 대표들이 바로 맥아더동상 철거사건의 주동자들인 강기갑, 오종렬, 천영세, 한상렬, 박석운씨였다는 점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이들은 전교조를 통해 청소년들을 촛불시위에 동원하여 마치 자발적으로 촛불시위가 일어난 것처럼 꾸미고 월드컵 당시의 붉은 악마 거리집회와 같은 모습을 연출하여 자유분망한 젊은이들을 동원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촛불시위가 후반에 들어가면서 이들의 실체가 폭로되고 촛불세력의 주장이 지나친 점이 분명해지면서 대중의 참여는 사라졌고 집회는 폭력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리하여 촛불시위는 결국 백여 일을 지나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이명박 정부도 타격을 받았지만 더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좌파진영이었다. 이 사건으로 친북좌파의 정국 주도권은 다시 회복되었고 합리적 진보세력은 다시 친북좌파세력의 둘러리가 되고 말았다. 진보신당도 민노당과의 결별을 철회하고 다시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민주당 역시 친북좌파와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촛불시위가 얼핏 보기에는 좌파진영의 대승리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보진영이 합리적 으로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건이었다. 광우병 촛불시위 사건 다음 해인 2009년에 있은 노무현 前대통령 자살사건과 그 후의 상황전개는 우리사회가 좌파들의 준동과 언론의 선동에 의해 얼마나 쉽게 출렁거릴 수 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4-5 천안함 폭침사건과 6.2 지방자치선거
천안함이 침몰하여 46명의 인명이 희생된 사건은 우리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제까지 소홀했던 안보태세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국민이 단결하여 북한의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북한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천안함 사건은 다시 한 번 우리역사 속에서 친북좌파세력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성숙하기도 전에 6.2지방자치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면서 다시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참여연대가 안보리에 서신을 보낸 사건은 다시 한 번 시민운동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우파세력의 단결의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5. 오늘의 시민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5-1. 좌우 분열의 이유
경실련 출범이후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요즈음처럼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약한 때도 없을 것이다. 또 요즈음처럼 시민운동이 정치화된 때도 없다. 원래 경실련이 출범할 때에는 시민운동은 非정파적, 非시장적 운동이었지만 노무현 정부이후 중도적 시민운동은 더 이상 존립하지 못하게 되었고 정파적 운동으로 전락되여 좌파와 우파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좌파와 우파사이의 대결구도는 조금의 변동도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동안 언론에서 보수와 진보간의 소통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했지만 뚜렷한 진전은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좌파일반이 친북좌파와 연대하고 있는 한 우파는 좌파와 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파는 야당이 친북좌파와 손을 잡고 있는 한 야당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다시 친북좌파가 설치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이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동안 우파와 좌파의 세력구분이 너무 명확해져서 어느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는가에 따라 자기의 삶이 좌우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패로 갈라져서 무조건 한편을 지지하고 있다. 사실은 좌파지식인 중에서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4대강정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세종시 수정안이 옳다고 생각하고, 북한인권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는 자기 소신을 밝히지 않는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야 출세의 길이 열리기 때문에 민주당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사회의 지식인 집단은 대단히 정치화되어 신뢰받는 공정한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결과 사회는 끊임없이 대립하고 국민여론은 어느 한쪽으로 모아지지 않고 있다. 과거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시절에 비해 노무현, 이명박 정부 하에서 사회적 갈등이 훨씬 증폭되어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5-2 시민운동의 바른 입장
이렇게 시민운동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지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우파와 좌파는 일반국민을 상대로 설득력 경쟁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다음의 입장이 시민운동의 바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5-2-1 친북좌파 척결
역사에는 청산되어야 하는 세력이 있다. 친일파와 군사독재세력이 이 부류에 속한다. 지금 이 세력은 더 이상 세력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친북좌파 세력도 우리사회에서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는 세력이다. 어느 사회에도 좌파와 우파가 존재한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간의 건강한 갈등과 경쟁은 나라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친북좌파세력, 김정일 추종세력은 그렇지 않다. 이 세력은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다. 먼저 우리나라의 진보적 시민운동과 민주당은 김정일추종세력, 친북좌파세력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 친북좌파세력은 맥아더동상 철거사건을 일으켜 처음 우리사회에 실체를 드러내었는데 전교조, 전농, 민노총, 민노당, 범민련, 한총련, 진보연대가 바로 이 세력이다. 물론 전교조, 민노총, 민노당의 모든 구성원이 다 친북좌파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들은 과거 김일성 주체사상파(NL)의 후신으로 여전히 친북좌파의 영향권 하에 있다. 민주당이 친북좌파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한 우리국민은 절대로 민주당에게 정권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다시 전교조가 설쳐댈 터인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도 중도실용으로 가는 것은 좋으나 친북좌파세력은 청산되어야 할 세력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면 우파도 한나라당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 않을 것이다. 또 우파운동도 좌파를 싸잡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친북좌파만을 타격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친북좌파세력이 청산되어야 비로소 우리사회가 정상화된다. 그렇게 되면 나 같은 사람도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누가 정권을 잡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노태우정권, 김영삼정권, 김대중정권 하에서는 특정 정당의 편에 서지 않고 정치적 중립의 입장에서 여야를 향해 시시비비만 가리었다. 앞으로 정치적 중립의 입장에 선 시민운동이 커져야만 사회갈등이 쉽게 조정되고 사회통합이 실현될 수 있다.
5-2-2. 북한에 대한 단호한 대응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난 이상 재발방지를 위해서도 북한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해야 한다. 이러한 대응은 전쟁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확실하게 전쟁을 막는 방법이다. 우리가 북한의 폭력적 언동에 겁을 먹고 북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계속 북한에 굴종하며 끌려 다녀야 한다. 지난번에 우리국민이 이명박정권을 택한 이유는 더 이상 북한핵의 위협아래서 굴종하며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굴종적 관계를 정상적 관계로 바꾸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김정일은 한국을 향해 테러공격을 감행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래야 한국에서 “이명박정권이 북한과 맞서니까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니 앞으로 북한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야당과 좌파들, 좌파언론들은 지금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북한보고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틀림없이 북한은 “봐라. 남한은 얻어 맞아야 정신차리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도발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천안함 폭침보다 열배, 스무배 더 큰 고통을 북한에게 안겨주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면 그것은 굴종이지, 절대로 평화가 아니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지킨다. 안보를 튼튼히 해서 북이 도발하면 반드시 격퇴시켜야 한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절대로 평화는 오지 않는다.
5-2-3 북한인권개선 촉구
한국은 더 이상 김정일 비위맞추기와 퍼주기로 가면 안 되며 국제공조로 북을 압박해서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점진적으로 인권을 개선하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북한을 붕괴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정부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한반도의 평화유지인데 북한붕괴를 획책하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의 인권개선을 주장하는 이유도 북한이 꾸준한 개선과정을 거쳐 정상국가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북한이 계속 경직된 체제로 가면 체제붕괴 이외의 다른 선택이 없게 된다. 우리가 북한인권법 제정을 주장하는 이유도 북한이 점진적인 인권개선을 통해 연착륙을 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인권을 주장하면 북한을 자극하게 되어 평화가 위협당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북한주민의 참혹한 인권유린을 외면하는 대가로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과 안전을 김정일로부터 보장받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오랫동안 지난 정권의 퍼주기, 비위맞추기에 길들여진 북한은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상당기간 동안 힘겨루기가 불가피하다. 우리는 이 기간을 견뎌야 한다. 북한주민의 생존권 문제도 넓은 의미의 인권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동포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북한이 천안함 침몰에 대해 사과조차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김정일 정권에게 식량을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두만강 변에서 조선족을 통해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쌀 지원이 김정일 체제를 강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굶주리는 주민들에게 전달되게 해야 한다. 5-2-4 세종시 문제와 지방분권문제
수도가 분할되면 안 된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을 보더라도 대통령집무실, 국회, 행정부가 반경 3-4km내에 밀집해 있다. 對面협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나라 행정부처의 일부가 과천에 있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9부2처2청과 국무총리가 세종시로 가는 것은 엄청난 행정비효율을 야기시키므로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렇게 세종시 수정안이 너무도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수정안으로 국론이 모아지지 않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원래 이명박대통령이 서울시장시절에 수도분할을 반대하면서 진정으로 국토균형발전과 수도권인구분산을 실현하려면 수도분할을 할 것이 아니라 획기적인 지방분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획기적인 지방분권을 실행해야 한다. 그래서 자치계획권, 조세권, 입법권, 교육권, 경찰권을 전부 지방정부에 주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세종시로 가게 되어 있는 9부2처2청의 업무가 지방정부로 가게 되어 세종시로 행정부처가 이전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자유선진당도 자기들의 공약인 강소국연방제가 실현되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수정안에 동의할 것이다. 왜 한나라당이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5-2-5 재개발정책 문제
지난 번에 용산참사를 겪으면서 신도시개발, 재개발, 뉴타운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그런데 신도시개발, 재개발을 하면 그 지역의 세입자들, 저소득층 주민들은 거의 다 떠나야 한다. 서울시 길음 뉴타운의 경우 원주민과 세입자가 재개발 후 재정착을 한 비율은 17%에 불과하고 나머지 83%는 전부 내쫓겼다. 그래서 이제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전부 내쫓기지 않도록 제도를 선진국형으로 바꾸어야 한다. 싹쓸이로 철거한 후 재건축하는 방식은 반드시 주택가격을 상승시켜 대부분이 내쫓기게 되므로 원주민의 재정착을 전제로 한 도시재생 방식으로 개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이미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이 길을 가고 있어 우리도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 원주민과 세입자의 재정착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도시개발을 하려면 정부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신도시가 되면 재산세가 크게 증가하기 때문에 정부예산이 미리 투입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부예산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개발이익 만으로 도시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5-3 시민운동에 대한 평가
지금 한국의 시민운동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주류 시민운동이었던 좌파 운동은 지금 이념의 덪에 사로잡혀 있다. 이번에 참여연대가 안보리에 서신을 보낸 사건은 좌파시민운동이 얼마나 심각하게 이념의 덪에 걸려 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좌파 시민운동은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친북좌파와 손을 잡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MB정부가 하려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하고 있다. 상식중의 상식인 세종시 수정안을 지지하는 진보적인 지식인이 우리사회에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얼마나 자유지성을 상실하고 패거리의 일원으로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좌파시민운동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국민의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외면당하고 있다.
그런데 좌파운동이 실패하고 있으면 우파 시민운동이 대안세력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우파도 실패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우파시민운동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이명박 정부와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율적인 시민운동은 취약한 반면 정권의 하수인으로서의 관변세력만 부각되고 있다. 정부에 의해 동원되는 대상은 있어도 비판적 지지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정부과 국민의 사이에서 소통을 매개해주는 시민운동이 없는 형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4대강 정비사업이다. 4대강 정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사업이지만 큰 틀에서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더라도 각론에서는 비판세력의 문제제기를 수렴해내는 비판적 지지세력이 없다보니 정부는 소통에 실패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정부가 소통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역대정부가 한결같이 시민운동을 정권의 파트너로 삼아 함께 국정을 운영했는데 이명박정부는 시민사회에 대한 몰이해로 자발적인 지지세력 육성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시민사회를 동원대상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좌파시민운동을 국정의 파트너로 삼을 수 없으면 이를 대체할 건강한 중도우파적 시민운동을 육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집권 2년반의 시간은 이일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건강한 시민사회 육성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결과 중도우파 운동은 보이지 않고 전통적인 안보세력만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안보세력은 좌파와 친북좌파를 구분해서 친북좌파만 공격하고 나머지 세력은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정부의 중도실용노선까지도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일반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 6.2 지방자치선거의 결과가 건강한 우파시민운동의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58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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