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서경석목사(기독교사회책임공동대표,
sksgo@netian.com)
1.
나는 평소에 ‘기독교시민운동’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왔다. 특별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퇴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 원인을 잘 분석해야 한다. 나는 교회의 퇴조원인이 지도자의 자세부족이라든지 혹은 한국교회가 성령충만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퇴조의 원인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난 120년의 기독교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특정 시기에 기독교가 부흥했던 이유를 분석해야 한다.
지난 120년의 한국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가 급성장한 시기가 두 번 있었다. 한번은 삼일운동 당시이고 또 한 번은 지난 7,80년대의 민주화운동 시기다. 이 시기의 한국교회는 우리국민에게 희망으로 비쳐졌었다. 1919년 당시 교회는 민족운동의 요람이었고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7,80년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어야 민주주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역시 사람들이 교회로 계속 몰려들어왔다. 다만 민주화운동은 진보교회 중심으로, 교회성장은 보수교회 중심으로 된 것이 삼일운동 당시와 다를 뿐이다.
7, 80년대의 한국교회가 민주화운동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WCC는 “제도교회 기구”(ecclesiastical institution)와 “전위적인 기독교운동”(avantgarde movement) 사이의 상호협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NCC와 각 교단을 제도교회 기구라고 한다면 당시의 기독학생운동, 산업선교활동, 인권목회자 활동, 기독자 교수운동, 민중교회운동 등을 전위적인 기독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그룹이 상호 협력하고 보완적 관계를 맺으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위적 기독교운동이 감옥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몸으로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제도교회 기구에 신선한 자극을 가하면 제도교회 기구는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여 전위적 기독교운동이 커지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87년 이후 N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유감스럽게도 바른 길을 가지 못했다. 첫째 이들은 민주화과정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독재에 협력하거나 독재 앞에서 침묵해 온 복음주의 교회를 향해 회개를 요구함으로써 해방이후 출옥성도들이 저지른 과오를 다시 되풀이했다. 이때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들이 겸허한 마음으로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끌어안았더라면 NCC는 87년 이후 한국교회의 일치운동을 주도하고 마침내 한국교회의 일치를 성취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다.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87년 이후 변화된 상황에 신축성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종래의 급진적 주장을 되풀이했다. 즉 진보적 기독교운동은 87년 이후 새로 출범한 노태우정권을 ‘본질적으로 전두환정권과 다를 바 없는’ 정권으로 보고 변화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일반신도나 국민과의 사이에 큰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87년 이전 민주화운동 시기에는 NCC를 위시한 진보적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일반신도들이 점차 NCC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고 NCC는 자연히 고립의 길을 가게 되었다. 여기에 지도력 부재현상까지 겹쳐져 NCC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 내에서 영향력을 급속히 잃게 되었다.
사실 87년 이후의 NCC의 실패과정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그리고 이 실패과정의 배후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존재해 있었다. 지난 시기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의 과정에서 진보적인 기독교는 독재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중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이 민중신학은 예수를 민중과 동일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민중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민중운동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민중운동의 절대화 경향은 투쟁의 한가운데에서는 민중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저항운동을 강고하게 하는데 기여하지만 그러나 이 절대화 경향은 일단 민주화과정에 들어서게 되면 거꾸로 운동 내부의 자기반성능력을 약화시키고 운동이 잘 안될 때 그 책임을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의 탓 - 주로 미국과 노태우 정권의 탓 - 으로 돌리게 한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의 세례를 받은 진보적 기독교는 변화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종래의 경직된 입장을 그대로 견지하게 된다. 그 결과 NCC는 고립화의 길을 밟게 되고 상황변화를 주도할 도덕적인 힘을 잃고 말았다. 저항운동의 한가운데에서도, 악과 싸우는 선의 운동으로 자기 자신을 미화하고 싶은 충동 속에서도 끝내 죄인됨의 고백을 잃지 않았어야 했는데 거꾸로 민중신학은 민중의 절대화 경향을 부추기는 길을 갔던 것이다.
2.
이처럼 NCC가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을 때 과거에 NCC가 견지했던 사회적 영향력을 새롭게 획득해 간 운동은 시민운동이었다. 경실련 등 새로 등장한 시민운동은 합법운동, 합리적 대안모색, 사회적 正論의 피력, 보통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 등 변화된 상황에 적합한 운동방식을 들고 나와 대다수 보통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나아가 사회여론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NCC 계열은 이러한 새로운 시민운동의 역사성에 주목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개량주의운동이라고 비판하였으며 그 결과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은 당시 쇠망해가던 재야운동과 함께 고립화의 길을 자초하고 말았다. 오히려 지난날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지 못했음을 반성해 오던 복음주의계열의 인사들은 시민운동을 성경적인 사회참여의 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민주화과정이후 지난 십오년간 한국사회의 여론을 주도해 온 시민운동이 요즈음 영향력 상실의 위기를 맞고 있다. 시민운동이 본래의 자세에서 벗어나 잘못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궤도이탈은 총선시민연대활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총선연대활동은 법 위에 군림하면서 정의의 잣대를 독점한 점, 그리고 합리주의와 良識에 기초한 운동이 아니라 포퓰리즘적 운동이었다는 점 등으로 해서 이 운동에 대한 당시의 열렬한 호응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의 묘혈을 파는 결과를 빚었다. 더욱이 총선연대의 탈법운동은 그동안 공명선거 켐페인이 쌓아올린 준법선거의 틀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시민운동이 앞으로 국민을 향해 법과 질서를 호소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의의 잣대를 독점하고 무오류의 낙선낙천명단을 만든 것은 결국 특정정당을 지지하는 운동으로 비쳐져 나중에는 홍위병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시민운동은 균형감각을 잃고 한편으로 치우친 주장을 하는 세력으로 간주되었고 사회적 正論을 피력하는 운동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은 다른 한편으로 권력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민운동이 사랑의 대상이 아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시민 개개인의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단체 스스로 권력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권력화현상은 시민운동 내부에서 言路의 차단, 異見에 대한 왕따 등 획일주의가 만연하게 하여 시민운동은 더욱더 경직화의 길로 가고 말았다.
3.
그런데 지금의 시대적 화두는 선진화이다. 나라를 어떻게 살려내어 선진국으로 가게 할 것인가가 문제다. 이 화두를 붙잡고 이를 실현시키는 세력은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세력은 몰락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동안의 시민운동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선진화의 걸림돌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실패 때문에 다시금 기독교에 기회가 오고 있다. 기독교가 시대의 징조를 바로 읽고 선진화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기독교는 다시 한번 민족의 희망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가 선진화를 위한 운동에 나서려면 먼저 새로운 기독교운동의 틀이 만들어져야 한다. 기존의 총회-노회구조로는 기독교의 인적 잠재력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비젼을 가지고 태어난 기독교NGO가 <기독교사회책임>이다. 이 단체는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모든 움직임을 적극 지지하고 걸림돌이 되는 움직임을 적극 반대할 예정이다. 나라살리기를 위해 발언해야 할 잇슈는 너무도 많다. 북한인권문제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고 정부의 과도한 평등주의가 주는 온갖 폐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공정한 경쟁체제 확립을 위한 경제정의 실현과 민간차원의 사회안전망 구축운동에도 앞장서야 한다. 이미 <기독교사회책임>은 민간사회안전망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220명의 활동가들이 지역에서 나눔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사회책임>은 과거에 전위적 기독교운동이 NCC와 공고한 협력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한기총>과 협력관계를 가지고 한편으로 선진화를 실현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기총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음으로써 한국교회 전체를 살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일이 쉽지는 않다. 기독교에서 사회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해 온 분들은 대부분 기존의 시민운동과 궤를 같이 하고 있어서 그분들은 좀처럼 새 운동에 합류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사회운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아 왔던 사람들이 새로 운동에 들어와야 한다.
최근의 뉴라이트 운동도 <기독교사회책임>으로서는 부담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뉴라이트 운동이 꼭 필요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운동이 “우리는 右派다.”라고 천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은 보수로 비쳐질 수도, 진보로 비쳐질 수도 있다. 80년대 말의 진보적 기독교운동은 좌파이념에 기초했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파이념에 기초한 운동도 맞지 않는다. 기독교운동은 근본적으로 성경말씀과의 부딪침에서 나와야 한다.
나는 크리스챤지식인들이 <기독교사회책임>이 제기하는 문제를 성실하게 고민해 줄 것을 희망한다. <기독교사회책임>이 출범할 때 한나라당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라든지 이 운동을 주도한 인사가 정치적 야망이 있다든지 하는 유치한 문제제기로 적당히 피할 사안이 아니다. 지금은 파라다임이 크게 전환하는 시기다. 과거에 재야운동이 시민운동으로 바뀌는 전환기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역시 편향적인 시민운동에서 다시 새로운 선진화운동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대 전환 시기다. 뉴라이트 운동은 이를 상징하는 한 例에 불과하다. 시대의 징조를 정확하게 읽고 새로운 운동을 꿈꾸자. 그리고 그 꿈을 함께 꾸어가자.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09:14 칼럼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