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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12-03 17:45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국 기독교의 진보 보수의 협력 가능성 모색 (권진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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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서경석
    조회 : 3,873  
   진보보수의협력가능성모색2.hwp (56.6K) [59] DATE : 2006-12-03 17:45:01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국 기독교의 진보 보수의 협력 가능성 모색

                              권 진 관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열린평화포럼 공동대표)

                            1. 문제인식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 좀더 구체적으로는 대북한 정책을 놓고 남한의 기독교 진보 보수는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진보 보수 양측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 큰 입장 차이를 보였고, 미국의 부시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도 분명하게 보였으며, 여러 면에서 양측의 입장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대북문제는 2007년에 있을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 어느 측이 정권을 잡느냐는 대북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대북 정책에 대한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양측은 대선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의 관철을 보장받으려고 한다. 이와같이 한반도의 평화문제는 내년의 대선과 不可分(불가분)한 관계 속에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 평화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다른 입장을 분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부차적인 목표는 양측의 정치적인 행보에서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북 문제는 정치적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에 양측의 일반적인 정치적인 입장과 현실정치와의 관계를 부각시켜 보는 것도 토론을 위해서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차이점들을 파악한 후에 양측이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해 보려고 한다. 우선 양측의 대북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2. 진보 보수의 대북 정책에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대북문제를 놓고 남남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갈등의 내용을 보기 위해서, 기독교 보수 진영의 대북 정책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보수 진영에게 대북관계를 비롯하여 정치 사회 경제의 전반적인 이론적 도움을 주고 있는 박세일 교수의 입장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북한의 체제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북한을 우리 식의 체제(시장원리에 기초한 자유주의)로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느냐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다. 박세일 교수의 정책은 채찍과 당근 정책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오로지 일방적인 이익 제공의 수단만을 사용하였다. 북의 변화와 이익 제공과의 연계, 약속 불이행 시의 불이익 제공 같은 노력은 거의 전무하였다. 한마디로 북이 변화를 거부할 때 경제적, 비경제적 불이익 제공이 전혀 없었다. ... 따라서 무엇을 위한 이익 제공인지 목표가 불명확하게 되어 버렸다.” 박세일, 대한민국선진화 전략 (21세기 북스, 2006) 99 쪽. 그는 통일도 자유민주주의의 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따라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흡수통일이 가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정말 바람직한 통일이 될 것이냐는 논의해 봐야 한다. 우리는 되도록 흡수통일이 되는 방향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남북 양쪽이 불행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세일 교수도 걱정하고 있듯이 북한 정부에 급격한 변수가 생겨서 흡수통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혹시나 국지전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철저히 막고 그러한 조짐이나 가능성은 물샐틈없이 예방 조치해야 한다. 흡수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독일의 경우와 같이 모든 것이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오히려 위험한 소망일 수 있다. 현재의 북한의 정치적인 통합능력이 견고하다고 볼 때 그러한 소망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흡수통일이 되면 남한에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큰 부담이 지워지게 될뿐더러 북한 동포들에게 큰 불행이 된다. 그들은 갑작스런 통일 이후에 2등 시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시민들 특히 비엘리트 계층인 민중들의 형편도 매우 열악해 질 것이 분명하다. 나아가서, 급격한 통일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비용들을 어디에서 조달해 낼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대북 정책의 기조는 남북의 평화적인 관계 조건 속에서 북한의 정치와 경제면에서의 자체 능력의 제고를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군사적인 현실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 양측은 일정하게 상호적인 군비 통제를 실시해야 한다. 이것은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는 기조를 의미한다. 북한의 독자적인 생존과 번영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소망을 우리들의 소망의 잣대로 裁斷(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좋거나 싫거나 반세기 이상을 자기들의 방식대로 살아왔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좋고 그르다고 밖에서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적어도 더 인간다운 삶의 길이 그 형편에서 더 없는가를 살피고 도와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더 이상이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요구할 것은 그들도 이미 찬성했다. 즉 한반도에 평화의 체제를 형성하자고 하는 것은 이미 상호협의 결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들에게 독자적인 삶을 살도록 오히려 북돋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평화의 길이며, 통일의 길이라고 본다. 
        북한에 인권 문제가 있다. 이번에 한국 정부가 북한 UN 인권 결의안에 찬성한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조는 북한 체제 자체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인권문제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인권 문제를 빙자하여 북한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발언이나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북한 인권 문제를 반체제로 몰고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자체적인 개선 능력이 있음을 믿고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그런 능력이 가능하도록 돕거나 여론 압력 등 인센티브를 활용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한수 가르쳐 주어야 한다, 혹은 우리가 뜯어 고쳐줄 수 있다는 오만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햇볕 정책과 포용정책으로 북한이 우리에게 내 준 것은 정말 하나도 없었단 말인가? 햇볕 정책과 포용정책이 가져온 결실이 없었단 말인가? 핵실험이 일어났다고 해도 우리 정부의 최근의 정책에는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 큰 결실이 맺어지지 않았던 것은 미국이나 미국에 동조하고 있는 남한의 보수세력의 영향에 크게 기인한다. 개성공단의 문제를 예를 들면, 미국은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made in Korea로 인정하지 않고 수출의 문을 막아 버렸다. 개성공단은 북한을 시장 경제 제도에 문을 여는 개혁 개방을 위한 관문이다. 북한 당국은 남한에게 개성 공단의 2000만평을 개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그 넓은 땅을 아직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이 남한 쪽에서 조성되지 않고 있다. 개성이 이만큼 개방된 것은 햇볕 정책에서 얻은 귀한 결과라고 하겠다.
        햇볕, 포용 정책으로 인해서 얻은 더 중요한 결과는 우리나라의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정책에서 독자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는 것이다. 미국 일변도의 종속 외교로부터 한반도의 운명을 평화적이고 주체적으로 개척하기 위한 남한의 노력은 국제 사회에서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으며 이제는 세계의 많은 양심적인 인사들과 국가들은 남한의 외교적 노력과 그 고충, 그리고 독특한 입장과 노선을 높게 평가하고 일정한 신뢰를 주고 있다. 북한이 아무리 남한의 유화책과 경제적 지원을 이용(?)해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남한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역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북한 주민들의 남한에 대한 신뢰도 그 만큼 높아져왔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여건과 상호적 바탕은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그만큼 줄이는 데에 기여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의 핵 실험 이후에 남한 국민들이 동요치 않은 모습, 그리고 안정적인 외환사정과 주식 시장을 볼 때, 이러한 것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핵실험이 실제적인 위협이 되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다. 남한의 그간의 평화정책과 독자적인 외교의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독자적인 외교를 가지고 박세일 교수는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고, 미국과 일본 등 우방들과의 관계 악화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의 이해관계는 전통적인 우방들의 이해관계와 대치되는 것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그리고 달라야 한다. 이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미국의 의견에 따라야 하고, 한미공조를 일방적으로 추종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할 때는 주저 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한다. 그러한 소리를 들을 귀가 있는 양식있는 평화세력이 미국 정가에 있음을 기억해야 하며 그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서로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한에 대한 책략 이전에 한국에 대한 책략이 있거나 그 둘을 동시 병행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하고, 닮고 싶은 사회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합리와 정의로움이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남한의 사회가 설득력있는 사회로 변모되어야 한다. 모든 나라가 닮고 싶어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 강대국들이 남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가 하자는 것에 찬성하지 않겠는가?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인권보장이 이루어지고 생태계가 보존되며, 안정적인 일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이웃나라의 노동자들의 삶이 보장되고 더불어 사는 정의의 나라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박세일 교수처럼 일인당 소득이 3만불의 선진국이라고 표현하면 좀 경박한 느낌이 든다. 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경제력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이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일자리가 없어 서민 대중의 삶이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의 3만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박세일 교수는 북한이 걸어왔던 자기 체제 형성과정에 대해서 존중하는 기미를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북한이 남한을 닮기를 원하는 것같다. 북한이 개혁 개방하여 남한의 “선진경제화, 지식정보경제화”에 참여하여 시너지 효과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책, 101 쪽.  그러나 여기에는 북한의 체제 존중의 측면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북한의 체제 존중이란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본 필자는 북한의 현체제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리하게 간섭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스스로 자기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며, 그러한 변화는 남북한의 평화적인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교류, 그리고 북한의 다른 나라와의 외교적인 관계의 성립과 경제적 교류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북한이 스스로 자기에 맞는 옷(체제)으로 갈아입을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앞당기려고 무리하게 강압하면 주체(독자성)를 신봉하고 있는 북은 자기 방어기제를 보일 것이 분명하다. 북이 그동안 이룩해 놓은 질서를 좋건 싫건 간에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북의 현 질서에도 우리가 높이 사야 할 것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북이 안심하고 개혁 개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박세일 교수는 우리에게 아주 안 좋은 시나리오 (재앙)로 북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붕괴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에 국지적 혹은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이것은 결국 주변 강국들의 “패권적 개입”에 의해서 “재분단” 등 나쁜 결과가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Ibid.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북의 현 질서를 존중해 주고 평화적인 교류를 통하여 이러한 재앙을 막아야 한다. 이것은 상당한 범위에서 남의 몫이다. 북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북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남은 형제로서 북을 보증해 주고, 남을 믿을 수 있도록 노력과 성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하여 북이 평화적인 선택 속에서 통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넓게 열어주어야 한다. 북이 그 길을 스스로 열어야 하겠지만, 남도 그것을 함께 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을 강대국들은 좁히거나 닫으려고 한다. 이것을 남북한이 함께 열어야 한다. 그 여는 과정에서 남북이 인권문제 등으로 가끔 다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남북의 평화와 교류 그리고 통일의 길을 남북은 함께 열어나가는 기조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박세일 교수는 북한에 대해서 일종의 “위협적인 경고”를 발하고 있다. 즉, 생명의 길(축복)과 죽음의 길(재앙)이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남과 손잡고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이루면 갈 수 있는 축복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북의 급격한 붕괴의 재앙의 길이 있다고 한다. Ibid. 그러나 그 길은 곧 북한에게만 주어진 선택의 길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길이며, 우리는 두 번째의 길이 선택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박세일 교수의 지적대로 연합해야 할 합리적 혁신 세력과 중도 보수 세력 중에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서경석 목사는 북한의 봉수 교회를 가짜라고 도발적인 언사를 발함으로써 남북의 기독교의 화해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러한 발언으로 남북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진다면 남북의 화해와 공동 번영은 물건너 가고야 말 것이다. 보수 수구 세력이 목청껏 규탄하고 있는 북의 인권문제를 보자. 앞으로 북의 인권문제를 거론하고 그 잘못을 지적할 때에는 바른 절차를 밟아서, 국민적인 합의 속에서 결정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국제적인 공조 속에서 행사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지금처럼 광화문이나 시청 앞 등에서 호전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반북한 운동을 벌이는 것은 신중치 못한 일이다. 스스로 합리적 보수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뉴 라이트는 수구 보수 세력의 이러한 신중치 않은 극단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자제를 요청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알아보자. 그것은 남북한의 연대와 신뢰회복을 통한 공동번영의 길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남한은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고,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이 있다고 본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남(과 북)의 경제발전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 줄 것으로 예상된다. 남의 경제활동의 범위가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며 또한 시베리아 철도를 통하여 유럽으로 연결될 것이다. 또한 남북의 경제적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박세일 교수의 3 단계론 즉 70-80년대의 산업화, 그리고 90년대의 민주화에 이어 21 세기는 선진화의 단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숨어 있는 함정이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의 교류의 활성화라고 하는 중차대한 국면을 선진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빼놓고 있다.
        박세일 교수, 서경석 목사 등으로 대표되고 있는 선진화 그룹의 선진화 정책은 오히려 허구적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오늘의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남의 경제 성장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TV 등 가전제품, 조선업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하지만 이 분야에서 더 이상 큰 성장이 보이지 않을 전망이다. 아직도 이런 경쟁력있는 영역에서도 (자동차 분야를 제외하고) 대일의존도가 매우 높다. 지난해 대중(對中) 무역수지 흑자는 230억달러에 이른 반면 대일(對日) 무역적자는 240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에서 번 돈을 고스란히 일본에 바친 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세일 교수는 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프로젝트를 달성하는 방법으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는 시장주의, 자유주의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다른 점이 어디있는지 모르겠다)을 통한 성장제일주의를 반복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시장주의를 통해서 자본을 축적하고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생각 뒤에는 민중의 수탈과 희생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민중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자본가들에게 몰아주어 선진산업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민의 다수가 가진 게 없어 소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국내시장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는데, 박세일 교수는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본인은 한국 경제의 돌파구는 대북 정책 속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북과의 공영의 길을 남한이 주체적으로 열어나가는 길 외에는 다른 획기적인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남쪽의 자본과 앞선 과학기술과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남북이 협조할 수 있다. 그 외에 남북 철도를 통한 물류비용의 절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망의 확보 등에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주목하여야 한다.
       
            3. 수구 보수 세력의 안보와 대북 갈등 정책의 정치적인 노림수   

        백낙청 교수는 그의 최근의 글에서 북한에 대한 압박 정책은 수구 보수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보았다. 백낙청, “남남갈등에서 한반도 선진사회로” 2006년 겨울호.  이것은 실제로 부시 정부의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서 사용되어왔다. 북한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설정된 악의 세력을 압박하는 정책을 통하여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이러한 방식을 사용했다. 한국의 뉴 라이트 등 보수 진영은 미국의 북한 압박 정책에 동조하면서, 6.15 공동선언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6.15 공동선언을 부정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독일 통일과 같이 한반도에서도 흡수통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건가, 아니면 통일이나 평화는 뒤로하고 한미일 공조를 바탕으로 힘으로 억제하겠다(containment)는 것인가? 전자 즉 갑작스러운 흡수통일은 남한이 감당할 수 없으며 양측 모두에게 불행이 될 수 있다. 현재의 남한의 경제력으로 북한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후자 즉 북에 대한 억제 정책은 남한의 경제를 위해서도 그리고 안보와 평화를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북의 대치상황의 지속은 역사의 진행에 역행이 된다. 남한의 경제는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값싼 노동력과 높은 기술력과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에 밀려 남한은 미미한 경제국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결국 선진화를 위해서도 남과 북은 공조하고 협력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과 뉴 라이트는 6.15 체제와 북한포용정책을 폐기하고 상호주의, 현실주의 등을 내세워 북한 압박 정책을 펴고자 한다. 이것은 민족을 위하고 민족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기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 그 간의 정부들이 노력했던 대북화해협력 정책을 무조건 모두 부인하고 있는 한나라당 세력과 손을 잡고 있는 선진화 그룹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한나라당은 자기들이 빼앗겼던 정권을 되돌려 받는 것만이 지상의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민족(적어도 북한 주민)을 희생하면서까지 정권획득을 위해서 저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선진화 그룹은 여기에 동조할 뿐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정책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나라당 그리고 선진화 그룹은 한 배를 탄 상태이며 여러 정책에서 동일하다.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주장하는 등 사교육 재단들의 비리와 부조리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고 그들의 기득권 수호에만 전념하고 있다. 공교육의 확대를 하향평준화로 보며, 돈 많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교육 정책을 펴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교육 정책이 채택된다면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더 심화될 것이다.             
        물론, 진보세력이 모두 다 잘 해왔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전교조가 교원평가제를 반대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전공노가 파업 투쟁에 섣불리 뛰어든 것도 옳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공무원노조는 관료, 공무원 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등 우리 사회의 정화에 우선적으로 앞장섰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들의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고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보 세력 중에서 권력기구 속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효과적으로 일을 잘 해서 나라를 안정 부강시켰다고는 보지 않는다. 간혹 혹은 자주 역량부족이나 부조리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하고 버블로 가게 한 것도 현 정부의 크나큰 잘못 혹은 미숙이라고 본다. 진보적 정부의 미숙과 신중치 못한 발언이나 정책 노선은 극복되어야 한다. 국민들을 설득하고 선진국민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적극적인 계몽, 정신운동을 펼쳐야 함에도 이에 대한 방책을 갖지 못하였다. 경제정책에서도 미숙함이 나타났다. 서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지 못 했다. 그러나 보수 정권은 이보다 얼마나 더 잘 할 수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보수 정권은 대북 정책에서 실패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권을 맡길 수는 없다. 그러니, 진보 정권이 환골탈태하는 자세로 스스로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들은 영원히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앞으로 진보 세력이 국민들의 신망을 다시 받으려면 지금처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해당 사안과 정책에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인사들을 등용해야 한다.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드는 think tank를 재야 및 정부 내에 구성해야 한다. 현 정부 하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think tank는 전혀 없다고 본다. 시급히 개선해야 할 일이다. 이제 진보진영의 일부 교수들이 민중적인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만 멈추지 말고 노동문제, 평화통일문제 등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정책마련에 나서야 한다. 고고하게 민중의 입장에 서서 성인군자와 같이 옳은 말만 하면서, 현실 정치라고 하는 진흙탕물에 뛰어들지 않으면서, 비판만 일삼는 진보학자들의 자세에 문제가 많다. 현재 정권을 창출하기 어려운 민노당을 밀어줘야 한다는 등의 현실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고답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입장을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일종의 무관심이다. 오늘날 “소위” 진보 학파들의 무기력화, 보수화, 비사회화, 비정치화를 우리는 주목해야 하고 반성해야 하며, 심기일전하여 모이고 결집되어야 한다. 진보 학계가 한눈을 파는 동안에 보수적인 학자들은 지금 열심히 모이고 있고 현실 정치가들과 손잡고 있다. 여기에 핵심이 되는 그룹이 박세일, 이명현, 서경석, 이석연 등이 주도하고 있는 선진화 국민회의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석연 변호사와 같은 극우인사, 박세일 교수와 같은 우파 인사가 참여하고 주도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 그룹을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가 짐작된다. 이 그룹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행진을 뒤로 돌릴 가능성이 많음을 예감하게 된다.
        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막을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직 입신양명의 기회주의적인 자세로 현실 정치에 참여한다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권력을 쥐는 자세를 취한다면 그런 참여는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 학자들은 현실 정치의 권력 자체를 잡으려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하고 그보다는 그것을 통해 역사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최대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러한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적 과정 속에서의 통일, 동북아 및 아시아 평화와 공영의 시대를 여는 일에 기여, 시장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약자의 보호강조, 불평등적 교육의 시정 및 공교육의 정상화를 비롯한 사회의 양극화를 제어할 수 있는 사회정책, 전국토의 균형적인 발전, 생태 환경 보호, 높은 문화 의식과 감각 교육, 강하고 튼튼한 국가 경제 건설 등일 것이다. 
        이제 소위 학자를 비롯한 재야의 현실정치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여야 하는가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를 놓고 논의해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특히 ‘선진화 국민회의’는 이번 대선에서 자신들이 세우는 정권을 창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학자나 재야는 일정하게 자신의 입신양명보다 높은 사회적 가치와 이상을 위해 봉사 실천하며, 그것이 여건상 혹은 능력 부족으로 현실화되기 어려울 시에는 미련없이 떠나 다시 재야와 학계로 복귀하여 공부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러한 학자적 경세가의 전형을 이황과 이이에서 발견하게 된다. 박세일 교수가 외형상으로는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하겠지만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이 부류의 기준에 못 미친다. 그러나 최소한 노력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진보진영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고 본다. 공연히 남의 말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좁은 의미의 라디칼의 모습을 지양해야 한다. 이것은 최근 백낙청에 대한 손호철의 비판에서 발견된다. 손호철은 백낙청의 논리의 큰 틀을 평가하지 않고 그의 논리에서의 작은 문제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약하다고)를 끄집어내어 맹비판함으로써 백 교수의 진보적 논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상주의를 버리는 것은 학자나 재야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고답적인 이상주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다. 박세일 그룹은 이상주의를 너무 버렸다는 점에서 문제인 데에 비해, 진보진영의 상당 부분은 너무 이상주의 혹은 원칙주의에 빠져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런데 뉴 라이트 운동과 현실정치와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다. 뉴라이트 창립대회에 한나라당과 민주당 당직자들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단상을 점령하다시피 한다거나 창립대회가 마치 전당대회와 같이 보일 정도로 정치색이 짙은 것을 보면서 정치와 시민사회가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설정하지 않고, 완전히 혼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보수주의 운동이 이렇다는 것은 보수주의 운동이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뉴라이트운동은 정치적 야욕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이게 하고, 순수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뉴라이트 운동이 정치에 들어가는 마지막 등용문처럼 보인다. 이 막차를 타려고 표를 사는 사람들의 줄이 길 것이라고 예측되며, 이 사람들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힘깨나 있는 것처럼 행세할 지도세력들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또한 뉴라이트 운동이나 선진화 운동 그룹이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인물중심의 모임으로 될 가능성이 많다. 이는 결코 민주주의적인 귀감이 될 수 없다. 박세일 교수가 인물중심의 정당은 안 된다고 했고, 포퓰리즘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뉴 라이트 운동 속에 이미 이런 것들이 다 들어와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수도이전의 반대는 수도권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한 지역주의적인 운동이었는데 이것도 포퓰리즘의 한 예이다.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를 중심으로 뭉친 이 세력이 어찌 인물중심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뉴 라이트나 선진화 그룹에는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이 있고 이들이 없으면 곧 무너지고 마는 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문제   

        위에서 본인은 학자 혹은 학자적 재야의 정치참여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제는 종교인이 정치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 몇 마디 하려 한다. 종교인들이 정치적이 되다 보면 극단적인 행태를 보일 때가 있다. 종교인들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판단하려고 한다. 중간의 길을 택하는 여유와 신중함이 없고 성급할 때가 많다. 편견이나 전이해로 판단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지난번 총선에서 기독당을 만들려고 한 세력들은 특히나 보수적인 종교인들이었고 그들은 현실에 대해서 깊은 전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협이나 합리적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도 뉴 라이트 중심으로 종교인들이 정치에 문을 두드리고 있다. 원래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비판적이 거리는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분리라고 한다면 정교분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완전 분리는 있을 수 없다. 심지어 비정치적인 종교인도 역설적으로 정치적이다. 그러니 요즘 종교인이 정치적으로 막나가는 것은 오히려 솔직한 일이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 간의 관계는 분리도 아니고 혼동(혼합)도 아니며 대화의 관계여야 한다. 종교와 정치는 대화적인 관계를 이루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 즉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정치인들과 연대하고 힘을 합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비판적, 대화적인 거리는 유지되어야 한다. 


                      5. 진보 보수 진영의 협력의 지점을 찾아서

        남한의 선진화는 한반도 전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북한과의 지속적인 대치 하에서의 선진화는 그 자체가 모순이다. 왜냐면, 남한의 발전 여력이 남한에만 국한 경우 너무 제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보다 큰 시장을 향한 교두보이며 통로이다. 북한을 개방시키지 못하면 남한의 선진화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북 포용정책은 선진화를 위한 필수요소이다. 우리는 보수 세력이 내거는 선진화에 대해서 일정하게 동조한다. 그러나 그 선진화는 백낙청 교수의 주장대로 남북한의 공조와 평화 속에서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본인은 기독교 보수세력에게 문제 제기하려고 한다.
        두 번째의 문제제기이면서 협력의 지점으로서 정치권 정화운동을 들 수 있다. 선진화 국민회의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진화 그룹도 비판의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선진화를 위해서 진보 보수 양측이 모두 참여하면서 현실 정치권에 문제제기 하는 방식으로 협력할 수 있다. 여기에서 논쟁점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북한 압박정책을 전제하느냐 아니면 북한과의 평화와 교류를 전제하느냐에서 양측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양측 모두 민족의 중흥과 선진화를 지향한다면 대북 정책에 대해선 양측이 심각하게 토론하면 양단간의 결말이 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결국 기독교 진보 보수(뉴 라이트, 혹은 선진화 그룹)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대북 정책에 심도있는 토론으로서, 우리 민족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대북정책이 더 적절한 것인지를 밝혀내는 일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02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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