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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5-20 12:29
   나의 목회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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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서경석
    조회 : 4,449  
   나의_목회신학.hwp (48.1K) [72] DATE : 2005-05-20 12:29:51




나의 목회신학
                                                  서울조선족교회 서경석목사

1.

나는 원래 목회하는 목사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정권과 싸우던 시절에 내가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불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나의 투쟁이 영성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는 다는 생각을 하면서 감옥에서 목사가 될 것을 결심했었다. 이때 나의 마음속에 그려 보았던 목사상은 문익환 목사님이나 박형규 목사님, 마틴루터 킹목사나 제시젝슨 목사와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한 후에 나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서리가 되었고, 그곳을 그만둔 후에는 경실련 사무총장이 되었다. 다만 목사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잠시 안동교회 교육목사를 한 적이 있었고 그 외에는 경실련에 파송한 전도목사로 목사직을 유지했었다. 경실련을 그만 둔 후 잠깐 정치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선배목사가 총회헌법에 의하면 목사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해서 목사직을 사퇴했다. 그런데 목사직을 사퇴한 채로 10개월을 살아보니 이건 영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 나는 나의 아이덴티티가 목사이고 목사로 살아야 삶의 의미와 보람이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회진출에 실패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시민사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었던 영등포노회에 다시 목사복직신청서를 제출했다. 선배들이 조언하기를 이번 회기에서는 삼분지이의 지지를 얻기 어려우니 다음노회에 복직신청을 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나의 천직이 목사라면 6개월을 늦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신청서를 냈고 정족수의 약간 미달로 그 회기에는 목사복직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다음 노회에서 목사로 복직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만들어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주일이면 친구인 조성기 목사가 목회를 하는 현대교회에 가서 협동목사로 목회를 도왔다. 신분상으로는 무임(無任)목사였던 셈이다. 점점 무임기간이 늘어나서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적당히 편법으로 목사직을 유지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목사이면서 매주일 설교를 하지 않으니 나의 영성 생활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배목사들에게 상담을 하면 전부 서목사는 시민운동으로 기독교에 기여해야지, 교회가 하나 더 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주중에는 시민운동을 하더라도 주말  만이라도 조그마한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한국인을 상대로 한 목회는 아무리 작아도 풀타임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마침 내가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입국사기 피해를 입는 조선족동포 천명을 입국시키는 일을 했다. 나는 그중에 몇 십 명은 기독교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조선족을 위한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생각을 마침 오랜 知友이자 선배인 인명진목사님에게 말씀드리니 인목사님은 제 팔목을 붙잡으며 마침 자기교회에 조선족들이 2-30명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돌봄이 없어서 미안했는데 자기가 매월 백만원 씩 지원할 터이니 갈릴리교회의 오후3시 예배로 조선족예배를 시작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이렇게 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20여명의 동포들과 함께 1989년 6월 6일 서울조선족교회의 첫 예배를 보았다.

2.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풀타임으로 목회를 하고 있지 않다. 주중에는 광화문에 있는 사무실에서 시민운동에 종사하고 주말에는 교회에 가서 교회 일을 본다. 그리고 처음에는 조카사위인 김의종 목사로 하여금 부목사 사역을 하도록 하고 교회의 모든 실무를 김목사에게 맡겼다. 나는 조그마한 교회를 하고 싶었는데 상황은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교회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재외동포법이 통과되었는데 조선족과 고려인이 배제된 채 통과되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조선족은 우리동포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즉시 김해성목사에게 연락을 하고 함께 명동성당 앞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서울조선족교회에서도 동포 3명이 나와함께 단식을 했고 약 30여명의 동포들이 함께 농성을 했다. 단식농성은 십일 만에 끝이 났는데 마침 그 당시 청와대에 수석으로 가 있었던 내 친구 김성재목사가 농성을 끝내기 위해 많이 애써주었다. 결국 법률안을 개정하는데 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 대신 동포들을 위한 획기적인 조처가 내려져서 나이 든 동포들의 친척방문이 시작되고 또 동포들 일부의 국적취득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울조선족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 교회에 가면 여러 가지 동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동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6개월 만에 교인수가 2백명 가까이 되었고 1년이 지난 후에는 교인수가 3백명을 넘어섰다. 교회는 완전히 장마당이 되었다. 2-3년 내로 출석 교인수는 6백명을 넘었고 매주일 새신자가 30-50명씩 나왔다. 

나는 서울조선족교회는 교인들만을 위한 교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2백만 조선족 동포 전체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교인과 비교인의 구분을 두지 않고 누구든 교회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면 조금의 구분없이 도왔다. 일자리가 없으면 교회에 와서 일자리를 찾도록 했고 잠자리가 없으면 교회에서 자게 하였다. 아프면 교회에서 진료를 받고 짐보따리를 둘 데가 없으면 교회 캐비넷사물함에 두도록 했다. 잡혀가면 꺼내주고 중병에 걸리면 병원을 찾아다니며 이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임금을 받지 못한 동포들의 임금을 받아주는 일을 했는데 그동안 받아준 돈이 50억원이 넘는다. 그러다보니 교회에 부교역자가 많이 필요하다. 지금도 7명의 풀타임 부교역자를 두고 있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부분은 불법체류동포들이 자꾸 잡혀가는 일이었다. 동포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천만원 가량의 빚을 지고 왔는데 이 돈을 미처 갚기 전에 잡히면 중국에서 지옥과 같은 삶이 이들을 기다리게 된다. 나는 교회가 생긴 후 2년이 지난 다음부터 불법체류자 강제추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몇 차례나 촛불집회를 가졌고 나 자신도 단식을 했다. 처음에는 20일간, 두 번째는 23일간, 세 번째는 열흘간 단식을 했다. 두 번째 단식에서는 단식 17일째 되는 날 위출혈이 심해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요즈음을 휴젼(fusion)의 시대라고 하지만 서울조선족교회가 바로 그런 셈이다. 우리교회는 교회이면서, 복지단체이면서, 동시에 권익옹호를 위한 투쟁단체다. 그런데 일단 투쟁에 돌입하게 되면 교회활동에는 큰 타격이 왔다. 투쟁을 열심히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교인들은 뒤로 쳐지고 투쟁을 열심히 한 동포들은 앞에 나와 설치게 된다. 투쟁을 다 끝내고 나면 설사 큰 성과를 얻었어도 교회에 큰 후유증이 남았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서울조선족교회는 일반교회처럼 오로지 신앙생활만 추구할 수 없다. 우리교회가 이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아무도 동포들을 위해 투쟁해 줄 사람이 없다.

특별히 우리교회는 지금 붕괴위기에 처해 있는 중국조선족사회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마치 일제시대에 한국교회가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고 70년대에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것처럼 서울조선족교회는 조선족사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동안 교회는 東北亞신문 발간, 기술교육센터 설립, 고향돕기 운동, 컴퓨터 교육, 자유왕래촉구운동, 연례 추석잔치, 테마여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해 왔다.

또 서울조선족교회는 조선족동포 선교의 황금어장이다. 매주일 교회에 20-50명의  새신자들이 나오는데 그동안 교회는 이들을 미처 감당하지 못했다. 이들의 약 20%는 중국에서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동포들이 몰려오는 이유는 서울조선족교회에 가면 어떤 문제도 다 도움받을 수 있고 그곳에 가야 모든 소식을 알 수 있다는 점이 입소문으로 동포사회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찾아오는 동포들을 교회내로 정착시키기 위해 서울조선족교회는 요녕교구, 흑룡강교구, 길림교구, 청년교구의 교구체제를 갖추고 있다.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는 동포들을 돕자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동포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인권문제, 복지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동포들의 삶의 현실을 알수록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신앙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동포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권문제나 신분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절망, 왜곡된 삶, 가정파탄, 가치관 없이 사는 삶의 문제다. 그래서 이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치유되려면 예수님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식이다. 많은 동포들이 서울조선족교회가 하는 일을 보고 처음에는 왜 교회가 우리를 돕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 했지만 기독교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나서는 목사님이 믿는 기독교를 우리도 믿겠습니다며 믿기로 작정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조선족교회는 정거장과 같은 교회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야말로 떠돌이를 위한 교회다. 특히 요즈음은 동포들의 귀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법무부의 조치에 따라 불법체류자는 1년 후에, 합법체류자는 6개월 후에 재입국할 수 있도록 조치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출석교인 수에 문제가 없는 이유는 이미 작년에 귀국한 동포들 5백명이 재입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정성은 오히려 서울조선족교회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오히려 이러한 특성을 잘 살려 조선족동포사회의 선교기지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이버교회의 성격을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서울조선족교회와의 연결이 잘 되도록 컴퓨터교육과 동북아신학원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3.

목회를 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때는 재작년 11월이다. 그동안 나는 몇차례 단식도 하면서 동포들에게 적어도 5년은 한국에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천만원이나 되는 빚도 갚고 돈도 어느 정도 벌어서 갈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몇 년간 애를 써서 결국은 정부로부터 새로운 대책을 얻어냈다. 이 대책에 의하면 4년 이상 된 사람은 돌아가고 3년에서 4년 사이는 최고 5년까지 있게 하고 3년 이하는 2년간 더 있게 한다는 조치다. 이 정도면 사실은 우리의 주장을 정부가 다 들어준 셈이었다. 따라서 나는 교인들에게 이제는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동포들은 안돌아 가겠다는 것이다. 돌아가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또 열심히 돈벌어 천만원주고 아내 혹은 남편을 데려왔는데 어떻게 돌아가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고민스러웠다. 이들 동포들이 불법체류하고 다시 잡혀가는 것을 쳐다만 봐야할 처지가 되었다. 그동안에는 최소 5년은 있게 해 달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그 주장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근본적인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들에게는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가 있는데 이 권리를 돌려달라는 주장을 하자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들이 더 체류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 수 없다. 정부는 대책없다고 강경하게 나왔지만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5천7백명이 국적회복 신청을 내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그리고 2천8백명이 9개 교회에 분산해서 농성에 들어갔다. 나도 17일간 단식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노무현대통령이 서울조선족교회를 방문하면서 결국 우리는 농성을 풀게 되었다. 이 결과로 국적취득의 문이 크게 열리고 모든 외국인노동자들은 일단 귀국하면 6개월 후에 재입국시켜주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정작 투쟁에 열심이었던 동포들은 이에 반발했다. 못 믿겠다는 것이다. 나도 동포들에게 엄청나게 매도당했다. 같은 조선족목회를 하는 다른 교회목사님들까지 가세해서 나를 매도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른 교회 목사님들은 불법체류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한국정부가 절대로 그런 정책을 입안할 수 없다는 점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내 말을 따라 귀국한 사람들은 2천8백명중 5백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들은 1년이 지난 후 전원 재입국했다. 이들이 전원 재입국하고 나서야 동포들이 서경석목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동포들을 위한 제도개혁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1-2년 내로는 중요한 제도개혁은 끝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조선족센터>를 짓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수십만의 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살게 될 터인데 이들이 고향처럼 생각하면서 갖가지 도움을 받는 복지센터가 생긴다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다. 

4.

요즈음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 편이다. 교인수의 증가를 위해 목매달고 있지도 않다. 국내일이 너무 바빠 동포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1-2년 내로 공동목회 방식으로 전환할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목회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서울조선족교회의 경험이 한국교회에 줄 도움이 있다면 무엇일지를 생각해본다. 

첫째는 조선족동포를 대상으로 한 목회활동을 하다 보면 전통적인 교회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조선족교회도 있다. 그렇지만 서울조선족교회는 민족문제를 안고 씨름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교회이자 NGO이고 권익단체이고 복지단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울조선족교회는 동포들에게 너무도 사랑을 받는 교회가 되었다. 처음에는 보수적인 교인들로부터 반발도 받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러한 모습이 더 교회답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서울조선족교회는 지금 조선족동포들에게는 희망의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포들이 계속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그 모든 사람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교회가 우리민족의 희망이 되어야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 나는 어떻게 하면 한국기독교가 우리민족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기독교 NGO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래서 서울조선족교회의 경험을 한국교회 전체에 적용해 보아야 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핵심 멧세지는 복음이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요즈음도 종종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의 나의 설교메모를 들여다 본다. 그러면 너무 한심하다. 옛날 나의 설교에는 복음이 빠져있거나 영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이점을 절실히 깨닫는다. 교회에 많은 프로그램이 있고 할일도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비록 내가 영적으로 충만한 설교자는 아니지만 매주일 한 발짝 씩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3:22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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