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회원가입   처음으로     
칼럼
 칼럼
 칼럼

선진화시민행동
사단법인 사랑의나눔
 
칼럼 >>  일반
ㆍHOME >  칼럼 >  칼럼 >>  일반
 
 
작성일 : 08-06-10 20:06
   수교 전 입국 동포들의 수기
트랙백
 글쓴이 : 서경석
    조회 : 5,067  
   수교_전_입국_동포의_수기.hwp (44.9K) [67] DATE : 2008-06-10 20:06:35




수교 전 입국 동포들의 수기

 - 이 글들은 17년 전 한중수교전에 입국해서  한국에서  살아오다가 이번에 강제출국 위기에 놓인 동포들의 글입니다. -


1. 방연순씨의 경우
 
 저는 한국 땅에서 살려고 몸부림 치고 있는 중국 교포입니다. 어려서부터 <돈 벌면 고향가야지 내 고향 뒷산에는 감나무가 많았다>며 입버릇처럼 외우시며 남쪽 하늘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씁쓸한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렇게도 그리던 고향에 늙으신 아버지는 못 오시고 대신 제가 친척 방문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고향소식, 친척들 소식을 전화로 자상히 아버지에게 알려 드리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께서는 그토록 그리던 고향땅을 밟으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사망하기 전에 <나를 남쪽 산에 묻어다오>했답니다.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께서는 영혼이라도 고향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일겁니다.
  그런데 내 할아버지의 뼈가 묻혀있고 내 아버지의 어린 시절의 꿈이 그려져 있는 한국 땅에 살려니 어찌하여 이토록 어렵습니까? 제가 한국에 거주한지가 16년 지나고 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한국에 체류하는 16년 동안 겪는 하고 많은 눈물겨운 사연은 석 달 열흘을 말해도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고국에 입국한 저는 인천 한 교회의 도움으로 3일 동안 따뜻한 보살핌을 받게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며칠 밤을 지새웠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오갈 데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한 식당에 겨우 취직하였는데, 고된 일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기만 하였습니다. 
  파를 다듬으면서 너의 나라에는 파가 있느냐? 마늘을 보면 마늘이 있느냐 하면서 인간 대우를 안 하기 때문에 일을 못하고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한 달에 직장 다섯 번을 옮겨 다닌 적도 있으며, 일한 임금도 못 받고 눈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후 1993년 5월 4일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단속에 걸려 철창 속에 하루를 갇혀 있었고, 150만원을 벌금으로 내고 풀려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돈만 벌면 되겠지 했는데 매년 정부의 불법체류자 집중 단속 때문에 직장을 버리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단속이 풀릴 때까지 집에 숨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 단속을 피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마음뿐이었습니다.
  공사 현장의 한밭 식당에서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하루에 다섯 끼니를 준비하느라 너무 오래 서 있은 탓에 발에 혹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했으나 의료보험이 없어서 경제적인 이유로 통원치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1년, 2년, 3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서울 생활에도 많이 적응이 됐으며 말투도 많이 바뀌어 한국사람 흉내를 낼 수 있었습니다.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장님의 배려 하에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는 저의 신분을 위장했습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이며 성도 이름도 다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신분을 속이고 살아가느라 숨을 조여가면서 할 말도 못하고 십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17년 전 중국을 떠나 올 때에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이 커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딸 결혼식장이 어디냐? 날짜는 언제냐고 물었지만 사실대로 말도 못하고 지방에서 하기 때문에 친인척들만 모인다고 하고는 휴가를 내고 5일 동안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가슴이 아픈 사연은 6년 전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갔어도 자식이지만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습니다. 이 불효자식은 눈물만 흘리고 큰 목소리로 어머님이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사연입니까?
  17년 동안 자식 한번 보지 못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우리는 이미 삶의 터전을 모두 잃었습니다. 17년 동안 자식 뒷바라지 가족 살림 책임지다 보니 돈도 없고 남은 것은 골병뿐인데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런 우리를 강제추방이라니요.
  경찰에 쫓기다 삔 발목을 절룩거리면서도 붙잡히면 벌금을 물어야 하니 경찰을 피해 다녀야 했으며, 하루 열세 시간 동안 힘에 부친 일을 하면서도 <거지같은 놈들> <돼지 같은 놈들>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에 울화통이 터지고, 눈물이 왈칵 솟는 설음. 가슴이 터지도록 그리운 내 새끼... 생각만 해도 눈물만 나는 늙으신 불쌍한 내 어머니...
  밤이면 밤마다 흘린 내 눈물에 적신 베개 안에 장편소설이 쓰여 있습니다. 선생님들 이제는 저의 눈에 눈물을 그만 흘리게 하고 지쳐 쓰러지는 저의 마음을 붙잡아 주셔요. 아버지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조상의 땅에서 갖은 고생은 다 겪었어요. 그동안 한국 땅에 정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소망도 있고 또 조상의 뿌리가 깊숙이 박힌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남은 여생을 살게 해 주세요.

2008년 5월 29일


2. 강연춘씨의 경우         

  저는 대한민국이 좋습니다. 제 인생을 글로 쓰면 한권의 소설책이 될 겁니다. 저는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났으며 올해로 쉰세 살입니다. 조상들이 중국으로 온 이래 남한의 친척들과 연락이 없다보니 한국에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중 수교 전에는 남조선에 친척이 있다고 하면 중국에서는 남조선 특무가 아닌가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아버지는 자식들에게 3촌 이름도 안 알려주고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남조선은 우리 조상들이 사는 나라이기에 가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던 1991년도 2월, 무역회사에 다니던 저는 남한에서 온 이문기란 분의 초청으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온 이래로 저는 친척을 찾으려고 2년 동안 KBS 방송국에 편지를 쓰고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시아버지가 살던 고향의 지방 경찰서에 의뢰도 했었지만, 종무소식이었습니다.
  친척을 찾지 못하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 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돌아가면 다시 초청을 해 줄 친척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입국한 김에 그냥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2006년 불법체류 중국동포를 위한 자진귀국 프로그램이 있었으나, 이미 15년 세월을 한국에서 보낸 상태에서 1년씩 중국에 가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또 내 조상의 나라에서 사는 데 설마 내쫓기야 하겠느냐는 마음에, 한국정부는 다른 선진국들처럼 수교전 입국자들에게는 영주권을 주지 않겠느냐는 마음에 눌러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저처럼 17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동포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슴 졸이며 제일 착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7년을 살았으니 이제 중국에 돌아가 무얼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 가운데 가족드라마를 즐겨 봅니다. 차를 몰고 손을 잡고 다니는 가족들과 가족 간의 사랑을 보면 어느덧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저는 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다 똑같은 삶의 자격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완전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며 살고, 어떤 사람은 이토록 모질게 간장 졸이면서 불법이란 딱지 때문에 가족을 외면한 채 숨어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17년 동안 저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시던 어머니, 딸의 얼굴 한 번 보고 눈을 감겠다면서 병환을 참고 견디던 저의 어머니도 이태 전에 마침내 숨을 놓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제가 죽는 것도 못보고 참담한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영주권이 무엇인지? 고국이 무엇이고, 대한민국이 뭔지?…그래도 그것에 매달려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이렇게 모질 수 있는 것인지? 이제 와서 저 같은 동포를 잡히는 대로 추방시킨다면 이는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추방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고 말아야겠다는 심정입니다. 조국이 이렇게 매정하고 몰인정한 나라인지 너무하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여생이라도 조국에서 편히 살게 해 주실 수는 없는 것인지요?

2008년 5월 19일


3. 채 순씨의 경우
   
  저는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살던 중국동포로 1991년 10월 16일 친척 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17년간 한국에서의 생활은 눈물의 세월이었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 세월이었습니다. 저는 부모의 고향인 대한민국이 너무나 그리웠고 너무도 오고 싶었습니다. 저의 집은 3대가 살고 있는 대가족이었습니다. 홀로 계신 아버님, 불구자 삼촌네 식구 3명, 시누, 우리식구 4명, 모두 아홉 식구가 함께 살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살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돈 벌 사람이 없으니 애들 공부시킬 힘이 없었습니다. 저는 큰 희망을 품고 아들 딸 어린 것들을 두고 집을 떠나 조상의 땅으로 왔습니다. 17년 전 13살 먹은 큰 딸, 10살 먹은 아들이 열차에 올라와 엄마 가지 마, 엄마 빨리 돌아와야 해 하면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발 버둥치며 울던 그 장면이 오늘도 생생합니다.
  저는 십 여년 간 건설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처음 미장일로부터 조적일, 페인트, 지경청소, 견출, 세차장, 식당일, 가정부, 별의 별 일을 다 해 보았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세멘포대며 벽돌을 너무 많이 등에 지고 날랐습니다.
  처음 현장에서 일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여 몽키 가져오라고 하면 망치를 가져갔더니 기술공들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고 바보 미련한 년이라고 하였으며, 더 심하게는 입에 담기 부끄러운 욕까지도 서슴치 않고 해 댔습니다.
  정말 무지무지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현장일은 너무너무 힘들고, 친척집에는 낯설어 갈 수 없고, 친구도 없고, 여자 한 몸으로 살다보니 이런저런 서러움 다 당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애들 생각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간당 5천원씩 하는 노래방에 찾아들어가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엉엉 울며 쌓인 울분과 원한을 풀고 나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아 병원에 가서 꿔 맨 적도 있었습니다. 방이라고는 기둥만 서 있는 아파트 현장 지하방이었고, 비가 오면 물이 차올랐고 겨울에는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집에 두고 온 자녀들 걱정에 눈물로 밤을 새우곤 했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교포라는 이유로 정상적으로 퇴근도 못하고 한국인들이 퇴근하면 나는 남아서 청소를 해야 했고 아침이면 출근하기 전에 나가 그날 일할 준비를 다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일당은 한국인의 2/3밖에 안 되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골탕을 먹이기 위해 더 많은 일을 시켰습니다. 남자와 여자 차이의 무시, 차별적 노임, 우리는 정말 눈물과 힘으로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2002년 5월 13일 현장에서 아시바를 타고 일하다가 불행히도 6층에서 추락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전 1년 동안 병원에서 입원했습니다.
  제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간병인도 안 붙여주고 보상도 한 푼 못 받았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 너무 보고 싶어 어느 하루도 울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저의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고 글로 다  쓸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사고로 인한 후유증이 너무 심합니다.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고 지금은 당뇨병으로 눈이 점점 안 보입니다. 집식구들의 뒷바라지에 아이들 공부시키랴, 17년간 번 돈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중국에 있던 신랑은 바람이 나서 가출하고, 애들은 사방으로 자기 살 길 찾아 떠났습니다. 이렇게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고 인제 오고 갈 데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17년간 산 정든 고향의 땅 대한민국에 살고 싶습니다. 전 애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저의 눈이 더 안 보이기 전에 우리 아들 딸 만나게 해 주세요. 친 이모가 한국에 계시지만 부모의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국적 취득도 안 되고, 제가 불법체류자로 있다는 이유로 이모가 조카인 저의 자식을 초청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산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조상의 나라에서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4. 김은순 씨의 경우

  저는 중국교포 김은순이라고 합니다. 한중수교 전에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지금까지 16년을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습니다. 저의 시아버님 시어머님은 동포 1세로 고향이 충북 옥천군이며 한국에 호적이 있고 저는 이집의 며느리입니다. 중국에서 저는 10여 년간 시아버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입국하여 국적 취득을 위해 힘을 썼으나, 뜻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된 일에 지쳐 저의 남편은 92년도에 급성심장마비로 한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분명 한국인의 후예이고, 우리 선조들의 땅에서 떳떳하게 살면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왔지만 국적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늘 가슴을 조이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저의 큰 딸 역시 한국으로 시집을 와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는데, 불행히도 2년 전 한창 꽃다운 나이에 이제 겨우 34살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이 죽기 전에 엄마가 불법이 아닌 합법이 되어 마음대로 일 할 수 있게 되면 죽어도 마음 놓고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딸의 말이 아직도 머리에서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제가 알기론 같은 피를 물려받은 동포를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추방을 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습니다. 국적난민과에 한번 찾아 갔으나 부모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저의 국적취득에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의 부모의 호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겠습니까. 벌써 저 혼자서도 해결했을 것입니다. 저의 친부모의 호적은 없습니다. 다만 시부모님의 호적이 있고 남편이 돌아가셨으나, 남편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시집을 와서 남편 집의 며느리로서 남편의 자녀들을 지금까지 모진 고생과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키웠습니다. 혼자서 이 모든 고난을 부등켜 안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한번 시집을 갔으면 죽을 때까지 그 집 귀신이 되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입장에 처해 있는 분이 몇 명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며느리도 시부모를 통해 국적을 얻는 것이 가능하도록 규정을 바꿔야 합니다.
  정부는 2006년에도 불법체류 중국동포들에게 대한 배려로 불법체류 조선족 동포들에게 자진 출국프로그램을 시행하여 추진하였으나 저같은 사람은 고마운 정책인줄 알면서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땅에서 살아온 16년의 길고긴 세월, 이 땅에서 쌓아놓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도 한국 땅에 묻고 자식까지 가슴에 묻어야 했기에,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미 이 땅에 17년을 정착하여 이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17년이라는 불법체류자로 불안과 고통가운데서 생활해 오고 있는 저의 입장을 감안하셔서 이제 남은 시간 자유롭게 조국에서 살 수 있도록 특별한 조치를 베풀어 주십시오. 

2008년 5월 31일


5. 채영희 씨의 경우

  저는 1991년 10월 8일 한국에 입국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저의 조부 채준식, 조모 엄도장께서는 경상북도 문경군 현철리에 큰아버지 가족과 살다가 살기 힘들어 1940년에 중국 만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저는 한국에 온 후 1992년 8월 추석에 2차례 경북 문경군 약석리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하여 고향에 계시는 당숙(채희민)을 만났습니다. 그 후에는 불법체류라 마음대로 못 갔고 또 어려운 일이 계속 생겨 오랜 세월 못 찾아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살아온 17년이란 긴 세월동안 노동일만 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긴장된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디를 가나 주위에서 나만 쳐다보는 느낌이 들고 혹시나 검문을 당하면 어쩌나 경찰이 지나가도 두려웠습니다.
  처음에 남편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하였으나, 남편은 중국의 직장에서 6개월만 휴가를 내고 한국에 왔으므로 6개월 될 때 직장복귀 만기일이 되어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중국으로 돌아 간 저의 남편은 B형간염을 수년 앓다가 그 후 암으로 발전하여 투병하다 2002년에 고인이 되었습니다. 2001년에는 아들이 현장에서 일하다 8층에서 떨어져 척추 골절상을 입어 8개월 치료하던 중 아빠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아들은 귀국하고 저는 돈을 벌기위해 한국에 남았습니다.
  저는 17년간 수없이 힘든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1993년에는 여권과 통장 몽땅 잃어버렸으나 신고도 못했습니다. 큰 남동생도 지하보도에서 강도를 만나 돈을 빼앗겼으나 신고도 못하고 병에 걸려 귀국하고 저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뿐입니다.
  그 후 2003년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주도한 단식투쟁에 참가했었고, 2005년 정부에서 수교 전 입국한 동포의 국적취득 허용한다기에 친척들을 찾아 봤으나 당숙은 연세가 많아 고인이 되었고, 그 자제 분들도 도와주기를 꺼려했습니다. 친척들은 경제적으로 풍부하게 살면서도 행여 자신들에게 번거로울 수 있다는 마음에서 도와주질 않았습니다.
  현재 와서 국적취득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 봤지만 친척들은 몰라라하고 고모님도 연세가 많이 됐으니 찾을 길 없고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몸이 불편하여 병원을 찾아가면 보험증 내라 주민등록증 내라 내 놓을 것이 없으니 애라 참자, 그냥 넘어가 버려 단 한 번도 제대로 건강 검진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불법체류라는 이름 때문에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해야 됩니다. 너무 많은 속박과 억압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법무부에서 저희를 강제추방하려고 한다니 너무나 억울합니다. 저는 현재 한국의 친척에게 “도와주세요!”라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중국 동포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초창기에 한국에 저의 사촌언니 아들이 먼저 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에 있는 당숙부님의 막내 아들 내외분한테 그의 장인을 데려다 놓고 약을 팔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숙부님 막내아들 내외분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찾아가서 나도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상황이 못 됩니다. 아버지 고향 어르신들은 다 고인이 되었고, 그 자녀분들은 “중국교포 는 싫습니다.”라고 합니다. 한국에 계시는 친척들의 말이 일본에 있는 친척이 오면 필요한 만큼 고향 분들 도와주는데, 중국에서 온 사람은 뭘 해 달라고만 한다며 만나기를 꺼립니다.
  제가 17년을 한국에 사는 동안 중국에 있던 저의 가족들은 죽거나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2005년에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오빠와 남동생과 작은 남동생이 모두 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제 저의 자매 셋만 남았는데 여동생은 한국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보고 중국으로 가라고 하면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합니다.
  우리가 크게 기대를 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를 추방하겠다는 정책을 내 놓았습니다. 우리가 왜 만주로 가서 원하지도 않는 중국사람이 됐습니까? 그 당시 살기 힘들어서 중국에 조상들이 갔을 뿐입니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한국에 있게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2008 년 5월 31일


6. 임경학 씨의 경우

  저는 임경학입니다. 1991년 6월 24일 그토록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성실하게, 열심히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저는 1992년 8월에 귀국하려고 비행기티켓을 끊었으나 공교롭게도 위와 십이지장궤양(다섯 곳에 구멍이 났음)이 생겨 길바닥에 쓰러져 입원하게 되었지요. 의사선생님은 한 달만 늦게 왔어도 생명이 위험할 뻔 했다고 했어요. 저는 4백밀리 리터짜리 혈액을 무려 여덟 팩이나 수혈 받고 겨우 살았지요. 의사선생님은 1년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요양해야 한다기에 저는 손을 놓고 쉴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여러 한국친구들의 경제적 도움이 있었기에 병은 완치되었지만, 대신 빚이 많이 생겨 빚을 갚으려고 건설현장과 식당 등지를 다니며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나 1994년 5월 17일 밤, 뺑소니차에 치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 골절상을 입고 또 수개월간 병원 신세를 져야했어요. 퇴원 후 2년 8개월간 재활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어요. 중국도 시장경제 원리에 따르기에 학비가 비쌉니다. 저는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아들만은 꼭 좋은 환경에서 훌륭히 키우고 싶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지만, 한국에 IMF위기가 닥친 관계로 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어요. 몸도 쾌유되었으나 현장에서 힘든 일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몸에 알맞은 직업을 택하다보니 목욕탕 때밀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주인을 잘못 만나 보증금을 날렸고, 새 아파트 입주자를 상대로 난연 필터장사를 했지만 그것마저 수개월간 봉급을 받지 못했어요. 몸이 회복되어 이제는 목돈을 벌어 아들 뒷바라지를 잘하려 했는데 현장 일을 시작한지 2개월도 못돼 그만 법무부 단속에 걸려 무려 8개월이란 황금 같은 긴 세월을 철장 속에 보내게 되었네요.
  법무부는 불법체류로 있는 우리 동포들을 구제하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저는 도저히 중국에 갈 수 없었어요. 연로하신 부모님이 피눈물 나도록 보고 싶었고, 7살배기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놓고 왔는데 이제는 의젓한 대학생으로 성장했으니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래도 저는 못 간다고 결론 내렸어요. 가서 발 뻗고 잘 집 한 칸 없는데다가 제가 들어가서 무얼 하겠어요? 최소한 1년은 그냥 먹고 살아야 하는데 수중 무일푼으로 병원에 가서 받는 재활 치료는 또 어떻게 하고요? 제가 귀국하는 날은 애가 대학공부 그만두는 날이지요. 저는 아들한테 못 배운 恨과 무식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서울이 너무 좋아요. 저만 부지런히 일하면 먹을 걱정이 없고, 그토록 배움에 목마른 아들을 걱정 없이 대학 공부시킬 수 있으니까요.
  저는 20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돌이켜 보니 34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네요. 그 34년 가운데 17년을 할아버지 고향인 서울에서 생활했으니 이제는 서울생활이 몸에 뱄어요. 음식 습관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말이예요. 심지어 17년간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니 이젠 중국말로 상대방과 대화도 못하겠고, 심지어는 상대방의 말뜻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하겠어요.
  그래서 더욱 서울에서 살고픈 마음이 간절해졌으며, 2006년 자진 귀국프로그램에 응할 수 없었어요. 그 당시 제 생각으로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수교 전 입국자들에게는 국적신청 기회를 주었는데, 부모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국적 신청 자격을 주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제가 국적신청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저의 할아버지대 까지 9대 독자이다 보니 일가친척이 없기 때문이었어요. 그래도 저는 중국서 족보를 가져다 친척 찾으려 모진 고생했습니다만 결국 찾지 못하고 이렇게 불법 체류자란 딱지만 붙었네요. 일가친척이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되고 없으면 타국인이 되어버리는 법이 너무 못마땅해요.
  한때 저의 아버지도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항일 의용군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총 들고 싸우셨어요. 그래서 저는 항일 투사의 후손이기도 해요. 그런데 단지 조국에 친척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내쫓기는 신세라니 정말로 억울하다는 생각이예요. 저는 다른 수교 전 입국자들과 함께 소송에 참여하였어요. 조상의 나라가 같은 핏줄인 저 같은 동포를 받아 주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네요. 

2008년 5월 29일


7. 신봉매 씨의 경우

  저는 신봉매입니다. 1992년 2월 22일 입국해서, 줄곧 식당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찍 병환으로 사망하셨고, 저의 어머니 안경희는 병환으로 일을 할 수 없는데다가, 동생 둘이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제가 한국에 남아 돈을 벌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뒷바라지를 한 결과 동생들은 대학공부를 마치고 외국으로 유학가게 되었습니다. 병든  어머니를 돌 볼 사람이 없게 되자, 어머니를 한국으로 오게 할 수 밖에 없어 친척방문 비자를 내서 한국으로 모셔왔습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동포 1세로 귀화를 했기에, 그의 딸인 저희 어머니도 간이귀화신청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귀화신청을 위해 수속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류연장도 못하고 불법체류자가 되었으며 귀화신청기회마저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의 어머니는 반신불수에 치매로 똥오줌도 못 가리는 것은 물론이요, 딸자식도 못 알아보고 있습니다. 밥도 곁에서 한 술, 한 술 떠 넣어드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데다 어머니마저 불법체류자의 신분인지라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갈 형편이 못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부에서는 단순히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저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사람도 못 알아보는 어머니를 모시고 귀국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설사 어머니를 모시고 귀국한다고 해도 중국에서는 돈 벌 능력이 없기에 어머니 부양과 치료를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한국 땅에서 “17년을 불법하지 않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합법체류기회마지 주지 않는다면 나 같은 사람은 어디 가서 살라는 말인가?”고 외치고 싶습니다. 


8. 허연단 씨의 경우
  저는 중국 흑룡강성 상지시에서 살아온 허연단입니다. 1992년 7월 중순에 친구의 도움으로 한국인을 소개받아 그 분의 초청을 받아 입국하였습니다. 당시 5살난 아들을 떼놓고 돈을 벌기위해 오느라 정말 괴로운 심정이었으나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입국하였습니다. 한국에는 친가 쪽으로 친척이라곤 없습니다. 단 남편 쪽의 친 이모님, 시아버님 친척은 많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돈 벌러 온 사람이기에 친척들한테도 도움을 요청할 면목이 없습니다.
  인천 항구에 도착한 배에서 나와 세관을 거치면서 참 막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갈 데가 없는 처지에서 인천에 사는 한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은 또 교회 교역자님의 도움으로 안산공단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2년간 일했지만 한국인과의 임금 격차가 2배 이상이 나는 것을 알고 너무 억울해서 나왔습니다. 한국 사람과 같이 일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 까지 일을 해도 욕을 먹기 일쑤였습니다.
  그 후 저는 목욕탕에 들어가 떼밀이를 하면서 마사지를 배웠습니다. 한 번은 평소 잘 지내던 단골아줌마들이 모여 저를 가리키며 “저 아줌마는 교포래, 저런 교포들 때문에 한국 사람들 일자리가 잠식되지.”하고 쑥덕거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이튿날 그 일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신고가 겁나서였습니다.
  똑 같은 한국어지만 참 알아듣지 못한 언어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잘 알아듣지 못하면 일하는 아저씨 반장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줌마 하면서 소리도 높이 지르고 할 때, 몰래 눈물도 많이 흘리고 울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과 똑같은 민족이며 또 부모님의 선택의 차이 하나로 우리는 이렇게 중국 동포 2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제 자신이 창피하고 초라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한국 국민보다 일을 더하고 (2시간 정도) 수당은 훨씬(10만원)적고 더 심한 노동을 해야 하면서도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 분들은 보너스도 주고 설마다 떡값도 주고 우리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완전한 인간대접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일을 하러 왔으니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일하러 나가면 한국사람 눈치만 보면서 가슴 졸였습니다. 불법체류 중국동포라고 눈치 채고 신고할까봐 겁이 나서 한 곳에 붙어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니 때론 한 달에 2번 이상 일자리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일거리가 쉽게 안 나지요. 때론 보름 넘게 놀 때가 많습니다.
  불법체류자 집중 단속에 들어갔다 하면 몇 달씩 집에 박혀 꼼작 않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애들 공부 시킨다, 시부모와 친정 부모 생활비 부쳐 보낸다, 셋집 잡아 집세 내고, 그렇게 2중 3중 생활을 하다보면 돈이 어디갔는지 없었습니다. 또 중국에서 친척이 온다하면 초청비 대주고, 오면 뒤를 봐줘야 하니 돈이 남겠습니까? 이렇게 반복하면서 17년간을 지내다 보니 돈도 마음도 모이지 않고 사연도 많고 사기도 당하고 너무 억울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17년 간 일하면서 사는 동안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임금체불이나 사기도 숱하게 당했습니다. 저의 단골손님 중에 한 여사장님이 저와 각별히 친했는데 말 한마디라도 너무 고맙게 해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급하다면서 돈 2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꽃가게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하니 저는 의심하지 않고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후에도 김치공장 한다면서 80만, 식당 낸다면서 100만, 또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해서 꿔주고 그런 식으로 880만이나 빌려갔습니다.
  저는 이 사장을 너무 믿었기에 차용증도 안 받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이게 아니다, 싶어 저는 중국 들어간다는 이유로 차용증이라도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한테 차용증을 주며 돈을 받아오라고 했더니 그 사장은 입 싹 씻고 돈을 안 주겠다고 떼질 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성남경찰서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래도 사장은 ‘집에 돈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것이었어요. 경찰서에서 말하기를 몇 억 원씩 못 받는 사람도 숱한데, 그냥 포기하는 것이 맘 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불법체류자라고 이용하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불법 체류를 하다 보니 친척이 있어도 아들을 초청도 못합니다. 불법체류자들한테 영원한 ‘이산가족’을 만드는 게 한국정부입니다. 6.25 때도 가족이 갈라져 생이별 하다가 2세들이 모국이라 찾아왔는데…, 요즘 남북도 이산가족 상봉이라고 1년에 두 세 번 씩 만남의 장을 갖게 하는데 우리는 이게 무엇입니까? 어릴 때 떼놓고 온 애들이 성장하여 결혼식 올리는 것도 못 보고, 부모형제 세상뜨는 것도 못 보고, 정말 악순환에 악순환이 거듭 됩니다. 내가 불법이면 나한테 죄 있지 왜 가족의 입국을 막고 있는지?
  그래도 저는 중국으로 못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집도 절도 없고 남편과 남남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17년 세월이 흘렀는데 무슨 사랑이 남아있을까? 저는 스스로 빈껍데기만 남은 어미거미 같다고 생각합니다. 죽으나 사나 여기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17년을 살고 난 지금 이제는 한국 땅도 저의 고향입니다. 중국에는 저의 모든 것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건강이 안 좋아 한 달에 약값만 50만원 정도 써야 합니다. 몸의 모든 기능이 떨어졌습니다. 아들이 와야만 나의 생존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의 입국 허용을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들이 편한 마음으로 고향에도 다녀올 수 있고 한국에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허가해주시면 더 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서경석 목사님은 저희들을 위해 단식 20일째입니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고 참 보기가 딱합니다. 우리들도 찬 세면바닥에서 생활합니다. 빠른 시간에 우리를 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6월 9일


9. 이 금순 씨의 경우

  저는 올해로 55세입니다. 1991년 11월 14일에 친척초청을 받고 한국에 왔을 때 저의 나이는 38세였습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일을 하면서 중국에 있는 아이를 교육시키느라 정신없이 살아왔습니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이라 어려움도 많았고 제약도 많았으나, 용케도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그만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중국으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저는 간병인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간병을 하던 집에서 임금이 체불되었습니다. 임금을 주지 않으면 간병 못하겠다고 하자 주인양반이 “아줌마가 안 하면 우리 엄마(할머니)는 어쩌겠냐?”고 사정사정 했습니다. 그 동안 체불된 임금 200만원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래도 밀린 돈이 자꾸 불어나 600만원이 넘었습니다. 차용증이라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양반은 차용증을 쓸 때 이름은 자기 이름, 주소는 자기 아버지 주소를 써넣어 문제의 소지를 남겼습니다. 변호사한테 가서 자문을 구하자 불법체류자이기에 100% 돈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습니다. 주인양반은 법원에 가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그 돈을 갚으려고 몇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 아줌마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결국 주인 양반은 무죄가 되고, 주소를 써넣은 주인양반의 아버지가 유죄라는 판결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또 그 집까지 찾아가 돈을 받으려고 하자 주인양반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해서 불법체류자라 도망 나왔습니다. 그 후 또 찾아갔더니 할머니는 갖은 욕을 다하고 주인양반은 물건을 들어 머리 겨냥해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신이 되는 것보다 돈 안 받는 게 낫지 싶어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또 변호사도 다시 상소해도 돈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해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집에서 간병을 하던 중 2006년에 같은 병실 간병인 한국 아줌마의 신고로 단속반에 잡혔습니다. 마침 제가 돌보던 주인한테 600만원의 임금체불 된 것이 있어 소송 중에 있었기에 1천만의 보증금을 내고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다 이번 법무부의 정책으로 지난 5월 13일까지 보호일시해제 기간 만료일이었으나 연장을 하러 가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 날 연장 받으러 갔다면 다른 동료들처럼 잡혀서 중국으로 추방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었으나 보증금으로 출입국 사무소에 넣은 1천만원은 고스란히 국가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날은 일본에 있다가 입국한 딸의 결혼식 날이어서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법무부에서 수교 전 입국 동포들을 위한 새로운 정책이 있다기에 가슴을 조이며 기다렸는데, 저와 같은 사람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잡히는 대로 추방을 한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연장을 해야 하는 날 나타나지 않자 저를 담당한 심사과 공무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다음 월요일까지 집에 가라. 들어올 때 규제 안 하고 무연고동포 입국절차에 따라 시험 쳐서 들어오게 한다. 만약 잡으려면 우리는 핸드폰 위치 추적해서 한 두 시간에 잡을 수 있으니까.”하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저 보고 중국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반문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가요? 개뿔이나 쥔 게 있나요? 이리 당하고 저리 쫓기고, 17년 동안 가슴 두근두근 거리며 산데다가 중국에 돈 다 부쳐 보내고, 때때로 일당 나가 몇 푼씩 벌어 들어오면 방세도 내기 힘든 상황이에요. 그런 와중에 중국의 가정은 가정대로 다 깨지고, 거기 가면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나요? 아무 것도 안 하고 어떻게 살아요? 제가 중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시간이 34년인데 15년은 중국에서 보냈고 17년은 한국서 보냈어요. 삶의 기반이 여기에 있는데, 이제는 여기 사람 다 됐는데 쫓아내겠다고요?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예요.”
  처음 중국에서 올 때 저는 한국에서 5년 지나면 영주권을 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10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준다고 해서, 속 타게 17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이명박 정부는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입니다. 중국동포를 그렇게도 미워하실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희들도 같은 동족이요,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점을 감안하셔서 조국의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2008년 6월 1일


10. 김 명숙 씨의 경우

  저는 1992년 2월 13일 친척방문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라는 멸시를 받고 지냈으며, 우리 조상들의 문화와 풍습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함께 저는 농사일이며 집안일을 다해나가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제가 아들, 딸, 뒷바라지 하느라 밤낮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려야 하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한국에서 중국을 방문 차 왔던 어떤 사장님께서 제가 자유도 없고 인권침해를 받는 중국 땅을 떠나 자유 대한민국으로 가서 행복한 삶을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 말에 저는 중국에 있는 집을 팔아 친척 초청으로 92년 2월에 한국에 왔습니다.
  저는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와서 행복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삼천리강산을 만끽하며 우리의 풍습과 문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가족을 다 데려 오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행복한 시간도 길지 않았습니다.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정부에서는 우리 동포들을 동포로 인정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내몰았습니다.
  저는 불법체류자 단속만 하면 식당 일하면서도 마음 조이면서 일하고, 사장님 눈치보고 집에 갈 때면 단속에 걸리까봐 경찰차만 보면 두려워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못하고 한 시간씩 걸어서 집에 오곤 했습니다. 집에 와서도 마음이 떨리고 자식들 생각나도 그저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식당일 하면서도 불법체류자라고 한국 아줌마들 보다 일은 더하면서도 돈은 더 적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식당에서는 일손이 모자랄 때에는 불러 쓰고 장사가 안 되면 그만 두라고 하면서 내 보내는 바람에 임금도 다 못 받고 그만두기도 하였습니다.
  식당에서 일하다가 경찰이 식사하려고 오면 겁이 나서 주방에 가서 숨어 있다가 경찰이 가면 나와서 일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돌아보니 16년 세월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식당일도 못하고 가정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부는 불법체류하지 말고 중국에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 돌아가도 집도 없고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경제적으로도 살 수 없으며 중국의 억압적 사회 환경에 적응해서  살 수 없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에 부모의 호적이 없어 국적취득을 하지 못하고 불법체류자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같은 핏줄 인데 단지 부모님의 호적이 한국에 없다는 이유로 국적취득을 하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처럼 호적이 없는 조선족 동포도 정부에서 오래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권리를 인정하여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2008년 10월 4일


11. 박 정옥 씨의 경우

  저는 한중수교 전인 1992년 5월 26일 조상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집에도 못가고 현재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는 박정옥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정부에 저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여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이 글을 씁니다. 불쌍하고 오갈 데 없는 저의 사정을 생각하셔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중국에서 태어나서 30여년을 살아오면서 한국은 우리 모든 동포들이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는 조국이고 자랑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한국으로 온 것이 믿기지도 않았고 자유로운 조국에서 열심히 살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한국에 입국하여 저는 다행히 아는 사람의 소개로 식당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힘든 줄도 모르고 제가 벌어서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마음에 가슴 뿌듯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한국에 나오기가 힘들다는 얘기를 자주 듣고 저는 이왕에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참고 벌어서 중국에 가서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렇게 있는 사이 저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제가 한국에서 17년 동안 살아온 세월을 책으로 쓰고 싶은 사람입니다.
  저의 외할아버지는 경북 울진 도씨 가문의 5형제 중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세 딸을 데리고 만주로 가면 뭐든지 해서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만주로 가셨답니다. 만주로 가서 아들을 보셨는데 바로 저의 외삼촌입니다. 제가 92년도에 한국에 온다고 하니 외삼촌께서는 외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족보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울진으로 가서 친척들을 찾았는데 앉자 마자 커다란 족보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족보에는 외할아버지 형제들하고 외할아버지(딸 셋 데리고 만주로 이주)이렇게 뚜렷이 써져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족보에는 딸들 이름이 안 적혀 있는 게 너무나 아쉽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셋째 딸입니다. 족보에 부모님 이름이 있는 사람은 국적을 주고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생전에 그렇게도 그리던 고향에 와보지 못하고 제가 한국에 온지 5년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효한 자식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제 주위에는 한국에 있으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어도 못가 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로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동안 죄라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습니다. 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다 가져가도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신고할 엄두도 못 내고 길에서도 경찰차만 보이면 떨리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화병에 심장병까지 생겼는데도 병원에도 갈 처지가 못 됩니다. 의료보험 카드가 없어서 약국에서 약만 대충 먹고 지냈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감정을 지니고 17년을 살다보니 이젠 온몸에 남는 건 병 밖에 없습니다.
  불법체류자로 살면서 단속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일자리를 옮기다 보니 돈도 모이질 않았습니다. 지금은 저와 같은 사람은 직장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파출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같은 동포로서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너무나 억울하고 대한민국이 원망스럽습니다. 더 억울한 것은 그렇게도 믿었던 남편은 저와 한마디 상의없이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제가 불법으로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나 봅니다. 믿을 사람 정말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17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집니다. 죄 없는 아들은 10살 때부터 26살까지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하면서 엄마를 많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저희를 합법으로 해주신다면 제일 먼저 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사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불법체류 동포들에게는 사면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를 강제추방 하는 것은 같은 핏줄인 동포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무자비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국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반겨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생활의 기반이 이미 다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집도 절도 없습니다. 제발 합법적으로 일만이라도 하게끔 해주세요. 저는 이미 이 땅에 정착을 하여 뿌리를 내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강제추방을 당하지 않는 한 결코 이 땅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붙잡혀서 보호소에서 평생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장기간 불법체류자로 불안과 고통에 생활해 오고 있는 저희들의 입장을 감안하셔서 남은시간 자유롭게 조국에서 살 수 있도록 특별한 조치를 베풀어 주십시오.
2008년 5월 30일


12. 유 명희 씨의 경우

  저는 한중수교 전에 입국한 사람입니다. 한국생활 17년 힘든 시련과 고난을 다 겪고 이제야 자리를 잡아 잘 살아 보려고 하는데 불법체류자란 딱지를 떼기가 그렇게도 힘들고 어려운지? 정녕 저희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지 한국정부에 묻고 싶습니다.
  한 나라에서 17년 움직이지 않고 생활했다면 세계 어느 나라도 그대로 두지 않고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한국에서 살다보니 중국의 가정은 다 파탄 났고, 가까운 사람들도 다 곁을 떠나고 집에 돌아간들 의지할 곳 없고 몸 둘 곳 없습니다. 이런 처지인 저희들을 꼭 집에 보내야 하겠습니까?
  저는 1995년 후반기 봉천동의 한 해물탕 집에서 일했습니다. APT단지라 배달이 많아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배달할 음식이 무거웠고 또 두발로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무거워 힘들었고 시간이 길어서 일 효율이 적었습니다. 이를 생각한 주인 언니는 일을 좀 쉽게 하고 시간을 단축하기위해 저보고 오토바이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이에 한 사람의 도움으로 오토바이를 끌고 나갔는데 나가서 20분 만에 사고를 냈습니다. 사고 나는 순간 사고 나는 줄 알았으나, 오토바이를 세울 수가 없었고, 오히려 브레이크를 꽉 잡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오토바이를 화단에 들이 박은 것입니다.
  저는 머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박아 정신 잃었고 멀리서 놀던 애들이 뛰며 왔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에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저의 외상은 미약했으나 머리를 돌리면 어지러운 뇌진탕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공부시키고 집에 생활비를 보내야 했기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일하면서 어지러워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평상시 교회에 안 다녔는데, 그 때만은 하나님께 의지 했습니다. 버스 타고 출퇴근 하는 길에 버스 안에서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애처롭게 생각하셨는지 어지럼증이 없어졌습니다. 근데 그 후 뇌진탕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프고 구토 증세를 많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의료보험증이 없는 저는 돈 때문에 병원에도 못가고 약국에서 약만 사먹었습니다. 병은 계속 되었고, 그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일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앓던 중 중국의 언니한테서 보내온 약을 먹고서야 뇌진탕 후유증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몇 년간 고생하던 오토바이 사고 후유증은 끝이 났습니다.
  또 한 번은 제가 잘 아는 한국분이 제가 불법인줄 알고 저를 신고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집도 못 들어가고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잠자며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참으로 서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상의 나라에서 돈을 벌어 잘살아 보겠다는데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내가 그 사람들한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참 억울하고 울분이 터졌습니다. 
  저에게는 한국국민인 외6촌 오빠와 동생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6.25 전쟁 이전에 남한으로 내려와 정착해 한국국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큰오빠인 박인환은 저의 국적을 해결해 주시려고 무척 애쓰셨는데, 부모의 호적이나 족보가 없다는 이유로 서류 제출도 못했습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인데 족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조국에서 17년 동안 불법으로 살았습니다. 불법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심정을 잘 알 겁니다. 취직할 때 "불법이면 안 되겠네요" 하고 또 일하다가도 “아줌마 불법이라면서요?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합니다. 또 길을 가다가도 검문검색 하는 것을 보면 돌아가야 하고, 은행거래도 잘 안 되고. 불법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요.
  그러나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오로지 중국에 있는 자식의 공부와 가정의 생활비 때문이라고 답을 하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한테 남은 것은 빈 통장 뿐입니다.
  제가 17년을 살았는데, 대통령만 다섯 번 바뀌었습니다. 말이 17년이지 진짜 긴 세월입니다. 17년을 살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고 고통도 많이 당했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심리적 고통이 더 심했습니다.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이제 한국에 기반을 거의 잡았는데 지금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저는 죽어도 못갑니다.
  중국에는 친척도 가족도 없습니다. 집한 채 없는 제가 어디에 가서 비비고 살아야 합니까? 또 만약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집에 가서 뭐든지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50대 중반인 제가 또다시 어떻게 시작해야 하고 또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저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한창 일할 나이에 조국인 한국으로 꿈을 안고 왔습니다. 사회에 적응하기에 제일 적합한 나이이다 보니 공산국가에 태어나 30여년을 그곳에서 살았지만, 대한민국에 와서 적응을 빨리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눈물 코물 다 흘려 가며 병든 몸을 이끌며 열심히 일했고 또 버텨 왔습니다.
  비록 제가 불법체류자이지만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조상의 나라가 아니라 저의 나라입니다.  한국의 오랜 생활에 제가 태어난 중국의 고향은 낯선 땅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어도 다시 올수 없다는 이유로 못가는 저희 마음을 모두들 너무너무 잘 알 것입니다.
  저의 아들이 한국에 유학 왔다가 조선족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어렸을 때 두고 온 아들인데 결혼하고 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엄마인 제가 돌봐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제가 없어도 저의 아들 부부는 애를 낳고 잘 키우며 잘 살 겠지만 어렸을 때 두고 온 아들이라 저는 엄마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2008년 6월 2일

13. 한 승호 씨의 경우
 
  안녕하세요, 저는 ‘수교전 입국자’ 유명희의 아들 한승호입니다. 저는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태어났고 연변 과기대를 졸업한 후 한국 서울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현재 티맥스 소프트라는 IT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글을 드리는 것은 바로 저의 어머니 때문입니다. 이제 거의 12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다시 떠나보내야 할지 모르는 아픔 때문에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어머니께서 한국으로 출국했습니다. 1992년 6월 좌우로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정말로 어렸고 아직도 그때 어머니께서 저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 제가 잘 때 가만히 떠났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때 떠나고 다시 만나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2002년 제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반년 동안 천안에서 공부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대략 10번 내외로 어머니를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연변과기대를 완전 졸업한 후 2004년 9월 서울대학교에 석사과정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2년 만에 다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 오게 되었고 여기서 취직하고 또 연변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안타까운 점은 어머니가 한국에서 17년을 살면서 잘 했던 중국어도 많이 잊으셨고, 완전 한국 사람이 되었는데, 다시 중국에 가면 어떻게 “외국 같은” 곳에서 적응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들도 연길에 없고, 중국 문화에 다시 충격 받게 되고,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혼자 어떻게 생활하겠습니까? 시험을 쳐서 다시 입국한다고 해도 전산추첨을 거쳐야 하니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2006년 자진출국 때에 못나갔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17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으니 한국정부가 합법체류는 보장해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선진국들에서는 그렇게 해주었으니까요 !
  솔직히, 제가 한국에 살면서 제일 속상한 부분이 바로 어머니가 합법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불법체류자가 되어 피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여기서 존중 받지만 저를 낳아준 어머니는 쫓기면서 살아야 하는 아픔이 너무 큽니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살면서 사고 한번 안내고 온갖 어렵고 힘든 일들을 다 했습니다. 식당일, 가정보모, 음식 배달 등, 가장 어려운 일들을 했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넘어지는 부상도 당했지만 이제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너무나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이 아들 입장에서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조국에서 모두들 말하는 “불법” 신분으로 있게 된 것은 저 때문입니다. 1992년 당시 한국에 와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 저를 공부시키고 저에게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어머니께서 혼자 한국에 건너왔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일입니다. 그리고 5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찾아 뵐 때마다 아내랑 세 명이 같이 식사하기도 비좁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저의 소원은 꼭 어머니께 편안한 집을 사드리고 허리 펴고 당당하게 한국이든 중국이든 평안하게 노년을 보내는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가 17년을 산 조상의 나라에서 쫓겨났다는 한을 품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50대 중반인데 어머니께서 이제 그런 비참한 처지를 당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니를 비롯한 ‘수교 전 입국자’동포 분들의 가정에 평안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2008년 6월 3일


14. 황 명식 씨의 경우

  한국에 온지 벌써 17년이 흘렀습니다. 20대에 와서 이제는 40대가 되었습니다. 참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의 세월이었습니다. 또한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나날이었습니다.
  저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들은 민족의 언어를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저를 한족학교에 보내지 않고 조선족 학교에 보냈으며 그 덕분에 한국에 와서도 언어상으로는 별 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91년 7월 달에 한국에 와서 이튿날부터 현장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갔고 저는 불법체류자라는 불미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다른 동포와 마찬가지로 자유스런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단속이 들어온다는 소리에 안절부절 못했고 길거리를 걸어도 낮에 경찰이 눈에 띄면 다른 곳으로 피하여 도망 간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엔 불안함을 가지고 지내고 있습니다.
  1년이 지나서 집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빚도 아직 못 갚았는데 가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는데... 그렇게 저는 아버님의 임종도 보지 못하고 아버님은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참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아니 제 가슴속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한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저는 또 제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이런 아픔을 안고 10년이란 세월을 또 보냈습니다. 10년 넘게 생활하면서 많은 한국 분들을 만났고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저를 볼 때마다 자기들이 보증을 서 주면 국적을 취득 할 수 있는가 묻습니다. 그 분들은 제가 한국에서 살아야하니 중국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2004년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수교 이전에 온 분들은 국적취득을 위해 소송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소송을 하겠다고 소송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전재 하에서 외국인 등록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와 몇 분은 연고자가 없다고 국적취득신청을 정부에서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15명과 함께 다시 소송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일도 못하고 외국인 등록증을 6개월마다 연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7월이면 연장기간도 다 끝나게 되는데 어떻게 될지 참으로 걱정이 태산입니다.
  지금에 와서 중국에 가라하면 그저 막막할 뿐입니다. 중국에는 부모형제도 없고 생활기반도 완전히 무너져 갈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한국이 저의 고향입니다. 17년이란 세월이 완전히 저를 한국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한국에 적응 되었습니다. 전 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체류 합법화가 빨리 돼서 저도 노후대책도 만들고 하루 빨리 결혼을 해서 가정도 꾸리고 싶습니다. 조선인의 후손으로서 조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당연히 한국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적을 주던지 영주권을 주던지 하루 빨리 해결해 주십시오.

2008년 5월 20일 



15. 전 영란 씨의 경우

  저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1991년 5월 남편 직장 일로 한국에 처음 오게 되었습니다. 꿈에서만 그리던 한국이라 설레고 많은 희망을 안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지난 17년을 되돌아보면 글로 담을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처음 한국에서의 1년은 남편이 곁에 있어 외롭고 힘든 일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1년이 지난 다음 남편은 직장일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후 저는 이름 없는 한 여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해도 저에겐 불법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그로 인해 일한 대가조차 받지 못한 일들이 허다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저의 지난 16년간의 한국 생활을 이렇게 팬을 들어 쓸려니 눈물과 서러움이 눈앞을 가립니다. 여자 몸으로 한국 땅에서 남들이 꺼려하는 일만을 찾아 다녀야 했고,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피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꼈고, 더불어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몇 번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참고 또 참았습니다. 몇 년 전 남편이 중국에서 죽었을 때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눈물로 참았던 저입니다. 앞으로 어떤 곤란이 오더라도 전 한국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다만 16년 동안 아들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이 된다 해도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제 자신과 싸울 것입니다. 저의 힘들었던 한국 생활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몇 글자에 저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2008년 5월 31일


16. 정 락찬 씨의 경우

  저는 1945년 10월 15일 중국 흑룡강성 상지시 하룡향에서 태어난 정 락찬 입니다. 저는 한중수교 전 사형(매제의 사촌동생)의 초청으로 1992년 3월 17일자로 한국 땅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평안북도 철산군 태생으로 한국에는 친척이나 연고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1992년 3월 17일 한국으로 망망대해를 건너오면서 열심히 일하여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매제의 도움으로 이용선이라는 아파트건설 현장의 사장님을 만나게 되어 92년 3월 20일부터 송탄시 건영아파트 현장에서 첫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건설현장에서 일 하다 보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또 한국생활에 잘 적응 못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인자하신 사장님의 따뜻한 보살핌과 동료 한국 근로자분들의 사심 없는 배려와 인정어린 가르침 덕분에 하루하루의 작업과 생활은 즐거웠고 보람을 느끼게 되었으며 한민족 한 핏줄의 따뜻한 사랑을 몸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하루하루 작업과 보람찬 생활은 어느 듯 흘러 3개월이라는 합법적인 시간이 지나 불법 체류자의 낙인이 찍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항상 단속의 불안감과 공포의 마음으로 건설현장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락을 함께한 한국 근로자들과 자상하고 인자하신 사장님의 보살핌과 배려 하에 요행 단속을 피하였지만 불안감과 공포심은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2년 3월 정부의 불법체류자에 대한 대사면 해택을 받아 잠시나마 합법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회고하여 볼 때 저희는 생활 습관과 행동에서 한국국민이 다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특히 한국 분들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한민족의 사랑을 절실히 느끼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재외동포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중국동포와 구 소련동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접하면서 동포들은 낙심과 허탈감을 느끼게 되었고 아픔을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모든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중국동포와 구 소련동포는 차별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중국과 소련의 동포는 조선 민족의 후예가 아니란 말입니까?
  고통 가운데 지내 던 중 우리 동포들이 고향 집처럼 생각하고 있는 조선족교회의 서경석 목사님과 모든 목사님들의 정성어린 노력 하에 존경하는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국가 일 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교회를 찾아오셨습니다. 노 대통령께서는 우리 동포들의 고통을 들어주시고 따뜻한 사랑과 배려의 말씀과 미래의 희망과 포부, 그리고 격려의 말을 하셨고 그 후로 재입국정책을 베푸셔서 수많은 동포들은 재입국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수교 전 입국자들은 그 당시 이미 한국에서의 생활이 15-6년 되었으며 국적회복을 위하여 소송 중이었기에 재입국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2007년 12월 29일 이명박 대통령님의 당선으로 저희는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허나 새 정부 출범한 후 수교 전 입국자들에 대한 법무부의 정책은 너무도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수교 전 입국자들에 대한 강제 추방으로 인해 저의 아내는 지난 1월 7일 불법체류 단속에 걸려서 보호해제를 통해 연장을 받아오다가 16년이란 정든 고국 땅을 5월15일 수갑을 차고 강제 추방당했습니다.
  17년 전 한국에 올 때의 기쁨과 희망, 건설 현장에서 함께 하면서 한국에서 살자고 한 우리의 결심이 법무부의 이번 5월9일 정책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차가운 수갑을 차고 선조들이 살던 정든 땅을 한을 품고 떠나는 17년차 수교 전 입국자의 恨을 법무부 장관님께서는 아시겠습니까? 고국을 찾아 16년의 시간을 함께 한 한국인의 후예인 우리 두 사람을 생이별시켜 이산가족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5월 13일 자진 출국하고자 서울출입국을 찾아간 사람을 2일간 보호관찰이라는 명문으로 구류하였다가 추방이란 단어를 써서 강제출국을 시킬 수가 있습니까?
  법무부의 5월9일 정책이 발표되고 수교 전 입국자들이 강제 추방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저희 수교 전 입국자들은 5월 19일부터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3층에서 무기한 농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희 수교 전 입국자들을 위해 서울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님은 다시금 단식 투쟁에 들어가셨으며, 다른 목사님들도 우리의 농성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법무부장관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2008년 5월 31일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17 칼럼에서 복사 됨]





 
   
 

 
 

서경석목사의 세상읽기

주소: 서울 마포구 토정로319, 3층
EL: 02-2275-0476, FAX: 02-2268-8217, E-mail: sksgo7788@naver.com

copy rightⓒsuhkyungsuk.pe.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