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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한 교회
갈 5:22-23, 눅 4:18-21, 고전 14:18-19
금년도에는 우리 서울조선족교회가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4장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우리 교회에도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데에서 시작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하셨고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후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성부시대, 예수님이 계신 때에는 성자시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주신 후는 성령시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이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낸다.”고 하시고 13절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우리의 판단이나 개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체험을 중요시하다 보면 방언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파 중에는 방언을 강조하는 교파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방언이 터져야 구원을 얻은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방언을 강조합니다. 방언은 성경에서도 증언된 행위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만 방언이란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래서 방언은 성령의 役事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하면 자칫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는 교인들이 자칫 독선적인 신앙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은 믿음의 확신을 갖는데 유익한 정도의 수준만큼만 강조하고 그 이상으로 강조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방언의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도 방언을 하는 것을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서도 사도바울은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다른 어떤 성도보다 방언의 은사를 가지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특별히 고전 13장에서 사도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무엇이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방언을 강조하지도, 방언에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저도 그런 부류의 기독교인에 속합니다. 그동안 방언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또 방언을 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방언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제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다 마찬가지이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은혜가 넘쳐 성령이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두 제자는 예수님이 성경을 잘 풀어 말씀하실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 진리와 접하게 될 때 우리의 가슴은 감동으로 뜨거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우리가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를 하더라도 우리의 능력으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나는 그다지 확신을 가지고 전도한 것이 아닌데도 상대방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경험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 성령께서 役事하셔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주님을 영접하게 하셨구나 하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때로는 목사가 확신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에 교인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도 하지만 성령이 우리를 떠나갈 때도 있습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유의 능력이 모든 목사에게 다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또 한 목사에게도 항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유의 능력을 보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단지 매개 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이렇게 겸손하게 마음을 비우니까 성령께서 함께 하셨구나 하고 느낄 따름입니다. 신유의 능력을 보이는 목사님일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그 분을 떠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우리가 하는 행위가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영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켜 自家발전을 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무엇이 참된 성령의 役事인가는 그 결과를 통해, 그 열매를 통해 알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은 주의 성령이 임하셨을 때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되고, 눌린 자가 자유함을 얻고 희년이 선포된다고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는 성령의 열매를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일일이 외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면 우리의 성격과 인품까지도 바뀌어져야 합니다. 지난 해에 우리교회는 열세분의 권사님을 선출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성령충만한 삶을 사시는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기도를 은혜스럽게 한다고 해서 성령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권사님들이 정말로 성령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고 계시는가를 알려면 함께 살고 있는 며느리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또 목사님이 얼마나 성령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려면 목사님의 설교가 얼마나 은혜가 넘치는가 만을 보면 안 됩니다. 목사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모님께서 다른 친한 목사 사모와 만나서 어떻게 자기 남편의 흉을 보는지를 들어보아 야 합니다.
목사님들에 대해서는 목사님들이 제일 잘 압니다. 목사님들에게는 목사님들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고 은혜가 넘치면 교인들은 그것으로 목사님을 높이 평가하지만 목사님들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인격, 인품이 종합적으로 평가됩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정도를 전부 종합해서 평가합니다. 인격과 인품이 모자라고 그분의 삶이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 목사님은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부흥회를 잘 인도해도 목사들의 세계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반드시 우리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재작년에 한국교회는 “어게인 1907년”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백년전 평양 대부흥이 다시 재현되기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철야기도도 하고 부흥회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 부흥집회가 우리의 결단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시 “어게인 1907년 행사”에 TV를 통해 참여하면서 마음 속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무조건 뜨거워지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영성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영적 감흥의 自家발전에 불과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게인 1907년” 행사 이후에 도대체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과 변화 없이 무조건 영적체험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영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은 참된 영성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다락방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 나타난 사건까지 연결시켜서 보아야 합니다. 성령강림이후 기독교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고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도 이점입니다. 성령충만을 오순절 사건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사랑실천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과 사랑실천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그 기쁨과 감격을 이웃을 향한 봉사와 헌신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말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쓴다면 그 과정에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사랑실천이 깊어지고 사랑을 실천할수록 더 성령이 충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영성이 부족한 채로 사회성만 강조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NCC 계통의 교회 중에서 그런 교회가 많았습니다. 우리교회는 그동안 조선족동포들의 권익옹호를 위한 투쟁을 수없이 해 온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쟁을 하고 나면 교회 안에 문제가 생깁니다. 투쟁을 잘하는 교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사정이 있어 투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주눅이 듭니다. 그래서 투쟁의 회오리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교회 안에 상처가 크게 나고 교회가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는데 상당한 치유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적 실천을 할 때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영성이 깊은 만큼만 사회적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회적 실천만을 강조하면 나중에 교회의 모습을 잃고 일반 사회단체처럼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충만한 만큼만 사회적 실천을 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깊이가 깊은 교회만이 헌신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교회는 다시 사회적 실천의 경험을 겪으면서 영성의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우리 서울조선족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31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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