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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을 받은 감사
에베소서 1 : 3-14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도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은혜에 감사해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성도들도 잘 알다시피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대륙에 와서 첫 번 소출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한여름에 수고를 해서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에게 감사하자. 밤낮으로 국경을 지키는 군인에게 감사하자. 그리고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에게 감사하자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학교선생님께 감사하고 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감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감사입니다. 또 일상생활에서 누구에게 도움을 받으면 감사 표시를 합니다. 감사편지도 보내고 인사도 합니다. 이런 감사는 누구나 해야 하는 감사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이런 감사는 아니지요. 제가 젊은 시절 미국유학을 할 때 뉴욕 부르클린 한인교회에서 고등부 담당 교육전도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추수감사절 날 고등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감사해야 하지요?” 그랬더니 “미국에 와서 공부 잘하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부모님이 미국에 와서 잘 정착하고 돈을 잘 벌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또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지요.”하고 답변했습니다. 또 내가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네?” 그랬더니 “꼴찌보다는 잘하는 것을 감사해야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꼴찌는 어떻게 감사해야 하지? 그랬더니 학생들의 말문이 막혔습니다. 사실 우리가 감사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하면 이 고등학생들처럼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에 감사를 한다면 대학에 떨어진 학생의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기독교인은 자식이 대학에 붙으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감사하지 않고 그러는 것이 되면 안 되지요. 떨어지든 붙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여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감사가 어떤 감사여야 하는지를 깊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에 대한 정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택하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셔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삼기로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해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증표로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결단해서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인간에게는 숨어 계십니다. 그리고 일부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전부 은혜와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고 감동과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만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감사해야 하는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까지도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害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을 마친 후에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올 때 제일 먼저 감사해야 할 점은 바로 이점입니다.
브라질에 사는 내 고등학교 동창친구가 있습니다. 똑똑하고 좋은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부인과 두 딸은 다 예수를 잘 믿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하나님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고는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는데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집안식구들이 아주 힘들어 합니다. 다른 식구는 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데 본인만 따로 행동을 합니다. 부인이 힘들어서 죽을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를 보고 자기남편 전도 좀 해 달라고 합니다. 나도 열심히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이 친구를 선택하셨는지 안 했는지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친구를 보면서 나는 택함을 받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영의 눈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사실 제일 무서운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입니다. 죽으면 나의 존재가 없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나의 존재가 영원히 없어진다면 얼마나 아찔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면 누구나 하나님을 쉽게 믿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또 그렇지가 않더군요.
인간의 몸의 신비가 놀랍습니다. 그런데 곤충의 신비는 더 놀랍습니다. 곤충에게 도 온갖 기능이 다 있어서 세상을 멋들어지게 살아갑니다. 우리들 인간은 그 신비를 1%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닷속 생물의 신비는 훨씬 더 감탄스럽습니다. 우리들 믿는 사람들은 모든 자연, 하늘, 땅, 바다 속, 동물, 식물,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밝히 증명하고 있다고 느끼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자연을 보고 진화론을 생각하더군요.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 거기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고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단지 고전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다릅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가? 그 차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들을 택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허락하고 우리에게 영의 눈을 주셨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神을 믿어왔습니다. 왜냐? 인간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계실 수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참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만 자신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게 되면 우리는 모든 일에서 적극적이고 자신만만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하면 자식들도 삐뚜러지지 않고 바르게 성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하면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도 잘 맺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믿으면 “나의 생명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 생명을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하루하루 사는 것을 아주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소홀히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면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복 받는 삶을 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역경도 있기 마련입니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집안에 우환이 생기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하고, 세상 속에서 잘못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기독교인은 항상 감사해 합니다. 시련을 시련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크게 키우시기 위해 단련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그 어려움을 견뎌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어느 때 차이가 나는가 하면 바로 역경을 만났을 때입니다. 남들은 찡그릴 때 우리는 여전히 싱글벙글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때는 도저히 감사할 래야 감사할 수 없는 정말 큰 좌절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인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대륙으로 온 청교도들이 감사할 꺼리가 넘쳐서 감사예배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인생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101명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떠나 2달만에 1620년 9월 11일 매서츄세추 주 케이프카드만에 도착했습니다만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인디안의 습격의 공포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1621년 2월28일까지 괴혈병, 폐렴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50명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봄이 올때까지 하루에 2-3명씩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3월에 인디언과 협약을 맺고 도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도 식량이 없어 일주일에 3일씩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간신히 인디언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수확을 얻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들은 인디안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90명의 인디언 용사들이 사슴 다섯 마리를 잡아오고 청교도들은 들에 나가 칠면조를 잡아서 함께 잔치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추수감사절은 칠면조를 먹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예배를 볼 때 청교도들은 절대로 감사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반 이상이 사망을 했으니 어떤 사람은 남편이 죽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죽고, 자식이 죽고, 어떤 사람은 부모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미국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그랬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강대한 미국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서로 원망하고 누가 신대륙으로 오자고 했는가하며 싸우고 후회했더라면 오늘의 미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추수감사예배를 보지만, 우리들 조선족 동포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해야 마땅한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믿는 사람들에게는 감사할 꺼리가 넘치는 한 해입니다. 제아무리 큰 역경이 있어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한다면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옥합을 깬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서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난리였습니다. “왜 이 향유를 낭비하는가?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했습니다.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의 마음을 잘 이해 못했지만 우리는 이 여인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너무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자기 삶이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는 어떻게 표현해도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잘 이해 못할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너무도 소중한 것을 내어 놓아 이것을 하나님께 바쳐 감사를 표현할 때 사람들은 “그 돈이 있으면 다른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데..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너무도 소중한 몫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마음으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31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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