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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14 14:50
   <9월14일 주일예배설교> 疏通하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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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서경석
    조회 : 2,227  


                                                    疏通하는 고통

                                                                                                                에베소서 2: 14-18


  요즈음 유행하는 말이 “疏通”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소통이 잘 안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촛불시위가 왜 그렇게 오래 끌었는가? 그것도 소통이 안 되어서 그렇고 왜 불교가 그렇게 심각하게 반발하는가? 그것도 소통이 안 되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니까 모든 문제가 소통이 되지 않아서 발생합니다. 사람의 몸도 피가 통하지 않으면 전부 병이 됩니다. 안마가 만병통치가 되는 이유는 안마를 해서 피가 온몸에 골고루 가도록 하면 병이 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암까지 치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우리사회의 모든 병들도 다 소통이 되지 않아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지요. 인간이 겪는 죄와 고통도 다 하나님과 소통이 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도 바로 “疏通”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바쳐 유태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들고, 율법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시켰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하여 유태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는 역할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소통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바쳐, 유태인과 이방인사이의 담을 헐고, 자신을 희생하여 유태인과 이방인을 새 민족으로 만들고, 평화를 이룩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과 화해시켰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할 때 참으로 명심해야 하는 점은 모든 것은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고도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까지도 그렇게는 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남의 죄를 사해주는데서 오는 고통을 누군가는 반드시 겪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병고치심도 전지전능한 권능으로 단번에 기적같이 고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병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몸에서 氣가 다 빠져나가 상대방을 살리듯이 자신의 사랑의 에너지를 다 소진시켜 그 힘으로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짠하고 인간들 앞에 나타나고 천사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닌다면 인간은 즉각 하나님을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몸으로 예루살렘에서 나시고 목수로 살아가시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까지 감수하셨지요. 그래서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른 疏通을 이루기 위해 모든 고통을 남김없이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의 사정을 보면 왜 “疏通”이란 말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꽉 막혀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 나뉘어져서 절대로 요지부동입니다. 이쪽의 말이 저쪽에 전혀 전달되지 않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교육문제, 운하문제, 수도권 규제개혁문제, 국토균형발전문제, 공기업문제, 어느 하나도 쉽게 소통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 안도 둘로 쫙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빨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서로 공중에 대고 지껄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저는 요즈음 소통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는 우리나라의 미래도 기독교의 미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소통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많지만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왜 소통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적은가? 그 이유는 소통을 가로막기는 쉬워도 소통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꼭 사람의 몸과 같습니다. 안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스포츠 안마는 아프지는 않고 시원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안마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안마가 있는 데 이 안마는 무지하게 아픕니다. 아파서 막 소리를 지릅니다. 안마하는 분이 처음부터 안마가 대단히 아플 터인데 이 고통을 참을 각오가 있으면 고쳐주겠다고 말하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나중에 고통이 다 사라지고 나면 그때는 몸도 다 나은 후입니다. 안마를 해서  피가 소통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과정이 그렇게 아픈 것입니다. 이 아픔 역시 “소통하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소통을 이루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소통의 과정은 개인이나 사회나 다 같습니다. 부부사이에서도, 자식과 부모사이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대통령과 국민사이에서도 소통의 방법은 다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죄인됨을 고백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되었다는 자만심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치 몸의 노폐물을 밖으로 내보내듯 자만심을 몸 밖으로 내보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 고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고 참는 일입니다. 이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 불교가 종교편향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불교가 문제가 많다고 본 목사님들이 많았지요. 그렇지만 꾹 참았습니다. 목소리를 높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종교간 갈등만 커지기요. 그래서 이번에 목사님들은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절감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셋째는 자기의 자존심을 죽이고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죽이는 일이 정말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하지 못합니다. 또 자존심을 죽이면 자기에게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이 자기를 우습게 보고 우습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성을 다 감수하면서도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저는 아내와 다툼을 많이 합니다. 제가 잘못해서 그렇지요.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많으니까요. 그러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가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 하며 독하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나는 아내가 화가 풀릴 때까지 계속 아양을 떨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 과정이 생략될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쉽게 저를 받아줍니다. 이날은 어떤 날이냐? 소통의 고통이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대신 아내가 고통을 감수한 날입니다. 내게 줄 스트레스를 아내가 대신 소화해 버린 것이죠.

  넷째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만나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선입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소통이 안 될 때에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선입관념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다음일 가능성이 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진실과 접하면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그 가능성을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성실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들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 인내심이 바로 소통하는 고통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싸움박질이 되면 소통의 과정은 중단되고 상대방은 입을 닫아버릴 것입니다.

  여섯째로 내가 틀렸고 상대방이 옳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일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또 그래서 소통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잘못했다고 말해서 끝나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때도 많지요. 이번에 저는 <우리들병원>에 대한 특별세무조사가 정치보복이다 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대립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에는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지만 이 행동의 결과로 제가 이명박 정부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지요.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여러 번 하면 제게 반드시 불이익이 오겠지요. 그래도 우리 편이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일곱째 맨 마지막에는 상대방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해야지요. 그러면 그 말이 상대방에게 틀림없이 먹힐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의 진실성을 상대방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疏通은 우리교회 안에서도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 교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도 생각이 서로 다르더군요. 그렇다면 서로 ‘소통하는 고통’을 내가 겪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런 ‘소통하는 용기’가 잘 나지 않을 때에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기독교인의 가장 큰 재산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해답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되지요. 남을 섬기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도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소통할 용기가 없을 때에도 소통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로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소통하는 고통>에로 초대 받았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추석날입니다. 여러분은 가족들과의 소통이 잘 되십니까? 부부끼리 헤어지고, 자식과도 멀어진 분들은 안 계십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도 막힌 담을 헐고 소통하려는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소통하는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12-01-18 18:14:31 칼럼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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